사막 족속

강변에는 하천이 없다.
1911년 이래 강변의 하천은 말라버렸다. 1980년 여름, 나는 비로소
강변에 나타난다. 하천이 마른 지 69년째.
나는 강변이 사막으로 향하는 입구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급속히 사막족속이라는 정령이 활기차게
나오는 것은 아닐까, 사막을 향해.
강변, 강변이라 주문을 외우고, 급속히 사막족속, 사랑해야 할 저 건조한 모래알로 된 정령들이 나간다, 걸어간다, 날아간다. 사막을 향해.
어디에 있어도 내 생각은 사막, 모래가 있는 쪽을 향한다. 건조한 토지,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 태양마저 바싹 말라 목구멍이 타버린 토지를 향해,
내 안에 있는 사막족속들은 급속히 활기에 차, 강변으로 한 방울 물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선 쾌활하게 휘파람을 불며 춤을 추고
맨발로 사막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나의 사막족속인 정령은 과감하다. 과감한 전사이기 때문에 사막을 향해, 일단 모래를 찾아내어, 그것을 향해 질주한다. 그것이 왜 그런지 따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광기도 아니고 착오도 아니다. 그저 본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나의 안쪽보다는 본래의 보금자리를 향해, 야수처럼 또 새나 물고기처럼 되돌아간다. 그들 사막족속인 정령이 일제히 날개 치며 달리는 소리가 뜨거운 오후에 들려온다.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보이는 시보다 커다란 훨씬 넓고 커다란 하천인 탓에 하천의 모습을 한 환영의 힘인 탓에.
내 안에서 그가 무엇을 꾀하고 다음에는 어디로 가는 건지 알지 못하면서, 아아 강변에서 나는 그들의 참으로 아름다운 기습을 보았다. 점차 내 안보다 활기를 띠고 밖으로 뛰어나와 고대 아즈텍까지 달려갈 것처럼 그들은 희망에 가득차 있던 것이다. 완전히 진기하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뜨겁게 오싹하는 음악과 같은 생리적 쾌감을 부추기는 듯한, 신성하면서도 추잡한 바람을 품고 누군가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막족속들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이따금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시를 쥐어짜 죽이는 것이다.
– 시라이시 가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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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이다. 이 시를 본 것도 시라이시 가즈코를 익혀둔 것도. 며칠 시간은 사납게 간다. 새벽 공기로 겨울은 벌써 저만치 지났다는 것을 잠 속에서 알았다. 잠결에 이불을 걷어내도 추워 움츠리지도 잠을 깨지도 않고 내내 꿈은 침대 언저리를 돈다. 오른 팔뚝에 머리를 얹고 왼쪽 허벅지를 오른 무릎 위에 올리고 몸을 살짝 비틀고 계속 잠을 청한다. 읍읍한 머리의 무게보다 아픈 것은 부재하는 것들의 자국이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꿈에서 읊조린다. operation a coeur ouvert, operation a coeur ouvert 그리고 나면 심장이 열린 듯 그 떨림이 정수리 맥까지 차오른다. 울고 있다. 엉엉하고 소리 내어야 하는데 울음은 성대를 흔들고는 입안에서 사라진다. 숨만 가빠올 뿐이다. 그 징그러운 날들의 상흔이 몸 어느 구석에서 꾸역꾸역 올라오는 날이면 힘들어도 죽을힘을 다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안도해야 한다. 꿈이라고 꿈일 뿐이라고, 냉장고를 열고 물통을 입에 대고는 벌컥거린다. 물이 넘쳐 가슴팍을 적셔도 기억만큼 왈칵 차갑지 않다. ‘그것은 광기도 아니고 착오도 아니다. 그저 본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온다. 더 크게 말하기 시작한다. Et qui sait quels êtres vivants Seront tirés de ces abîmes Avec des univers entiers …….

사고싶은 책 / 산 책

새로 나온 책들이 꽤 된다. 근래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간 놓치고 간 것 중, 사고 싶은 게 몇 권 있다. 학교에 나가면서부터 한동안 멀찍했던 인문학 부문이 눈에 밟히고 ‘쫙’하는 소리에 베이고 싶다.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 (김덕영, 윤미애 옮김) / 새물결
「Die Zeit, Der Morgen」등의 잡지에 발표한 글과 「사회학, 사회화 형식들 연구」에 수록된 글을 선별해서 수록했는데, 짐멜은 19세기 당시 지배적이던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돈, 여행, 성, 종교, 얼굴, 편지 등과 같이 일상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현상들을 철학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사회를 분석하고 있다. 짐멜을 일면 깎아내고자 붙여졌던 ‘철학적 에세이의 대가’, 그의 글을 믿을만한 역자를 통해 새롭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꽤 설레는 일이다. 오래전에 짐멜의 『돈의 철학/한길사』과 『여성문화와 남성문화/이대출판부』가 번역됐으나 전자는 절판이고 후자는 단 4편의 논문만을 싣고 있어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한껏 가시길 바란다. 그런데 잘 몰라서 묻는 건데 Die Zeit 와 Der Morgen은 다른 잡지 아니었던가?
『법의 힘』 자크 데리다 (진태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우리에게 ‘데리다’라는 이름은 익숙하지만 그 자체로 난해함과 더불어 오역의 탈로 멀기만 하다. 어찌하다 보니 보너스 포인트가 쌓였기에 내내 미루던 것을 주문했다. 진태원 씨의 번역이라 슬쩍 기대가 된다. 데리다 철학의 용어해설과 옮긴이의 주가 한가득 이고, 데리다를 이해하는데 일정 도움이 될 것이다. 『법의 힘』 2부에서 데리다는 ‘지배계급의 폭력에 대한 좌파의 대항폭력의 정당성 문제’를 제기했던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를 다루는데 부록으로 벤야민의 글이 실려 있다. 전에 자율평론에서 이성원 씨 번역으로 선보였었는데 새로운 벤야민의 소리 역시 기대가 된다. 그리고 1976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강연한 「독립 선언들(De’claraations D’independance)」도 함께 실렸다. 옮긴이의 말을 보니 조만간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새로 번역되는 듯싶은데, 어서어서 나왔으면!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프랑수와 라블레 (유석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많은 분이 고대하던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이 대산문학 총서로 드디어 나왔다. ‘드디어’라고 말하기에는 꽤 시일이 지났지만 대산 총서 목록이 발행된 게 99년 즈음이었던 걸 참작하면 좀 늦은 소개쯤이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목은 한치는 늘었을 것이다. 이 문지판을 들췄을 때, 기존의 을유판(민희식 옮김)에 비해서 두께가 상당히 얇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 두께뿐만이 아니다. 해서 일정 부분을 을유판과 비교해 봤는데, 문지에서 완역본이라고 떠버렸지만 유감스럽게도 완연본이라고 하기에는 80퍼센트는 모자란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5서까지 있는데, 이번 번역에서는 1, 2서만이 번역됐을 뿐이다. 팡타그뤼엘 3, 4, 5 서는 어디다 내뺀 것인지(생트 뵈브의 라블레론도 없다). 또 하나 언젠가 연대에 들렀다가 친구의 꼬임으로 유호석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니 이런 사람이 라블레를 번역한단 말이야’라고 실망했더랬다. 그치만 문지판을 읽은 것은 아니니 번역의 질은 글쎄. 그래도 사고 싶다. 가로로 읽고 싶다.
『시집』 말라르메 (황현산 옮김) / 문학과지성사
모두 알 만한 시구,“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구나.” 말라르메 ‘바다의 미풍’의 처음이다. 황현산 교수의 번역과 엄청난 각주로 말라르메가 우리에게 왔다. 기존에 숭실대출판부에서 이준오 교수의 번역으로 나왔었는데,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마티스의 판화가 시집에 함께 실려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하튼 『목신의 오후』만으로 갈증을 해소하던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소식이다. “그러나, 오 내 마음이여, 말라르메의 노래를 들어라!” 꼭 사고 말 테다!
『중첩 』 들뢰즈 (허희정 옮김) / 동문선
2천 원 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샀기 때문에 아마도 후회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 극작가 카르멜로 베네의 「리차드 3세」와 들뢰즈의 「마이너 선언」이 함께 실려 있다. 들뢰즈를 통해서 베네를 알았는데, 베네는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者/性)문학의 의미에 쏘옥 들어맞는다. 허희정 씨 번역은 처음인데 이렇게 잘 읽히는 들뢰즈가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같은 역자의 노고로 들뢰즈의 『디알로그』가 곧 나올 텐데 기대 만빵이다.
『창조적 진화』 베르그손 (황수영 옮김) / 아카넷
베르그손이 번역 됐다는 것 자체가 반가운 일이다. 창조적 진화는 전에 박영문고(정한택)와 을유(서정철)에서 두 번이나 번역됐음에도 결국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고 언젠가 학교 세미나도 참여했는데, 내 불어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됐을 뿐이다. 부디 번역도 진화하되 창조적이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황수영 교수가 요전에 냈던 『베르그손-지속과 생명의 형이상학/이룸』을 읽어본다면 이런 우려는 단지 우려에 그치겠지만. 덧붙여 『물질과 기억』도 누군가 다시 번역한다면 얼마나 이쁠까.
『희망의 원리』 에른스트 블로흐 (박설호 옮김) / 열린책들
솔에서 1,4권을 내고 세월아 네월아 하더니 열린책들을 통해서 완역본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총 다섯 권인데, 가격이 9만 원이다.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는 사회주의를 하나의 진리로 취급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무엇을 희망하는지, 미래에 무엇을 희망할 수 있으며 긍정적인 미래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만큼이나 이 책의 운명도 기구하다.1956년 소련이 ‘헝가리 인민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한 데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블로흐는 이를 이유로 동독에서 반당분자로 낙인찍혀 모든 공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된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구축되는 중에 서독에서 휴가를 즐기던 블로흐는 자신의 원고를 들고 트뷩겐에 정착하는데 사회주의 미래를 담은 책은 사회주의 현실의 좌절과 함께 망명하게 된 셈이다. 블로흐를 처음 만난 것은 『철학 입문(a philosophy of the future)/청하』을 통해서였는데, 이 역시 진보의 가치와 가능성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희망의 원리와 큰 축이 비슷해서, 그 중 일부일까 찾아본 적이 있지만 서지에 대해 확인을 할 수 없었다. 이렇든 저렇든 역자의 노고에 감사를! 맘을 구디 먹고 사려는 찰나, 엄하게도 『 Histoire de la vie privée/Seuil』 1-5 전질을 사는 바람에 기약이 없어졌다. 『사생활의 역사』가 처음 프랑스에서 발간될 때 값이 케이스 포함 2,000프랑이고 지금 유로화로는 권당 72.5유로에 판매되고 있다. 전질일 경우 대략 40만 원 이상인 셈이다. 그걸 샀으니 모든 책들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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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랜지』 안소니 버제스 (박시영 옮김) / 민음사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로 많이 알려졌지만 원작은 더 훌륭하다. 이미 지학사(벽호)를 통해서 옮겨졌었는데, 역시나 절판이다. 지학사 판에는 ‘시계태엽 오렌지’의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the wanting seed’가 ‘조직과 생명’이란 제목으로 옮겨져 있으나 이는 민음사 판에는 실리지 않았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권미선 옮김) / 민음사
오래전에 울림사에서 박찬희 번역으로 나왔을 때(박경범이 옮긴 울림사 판이 아니다) 느무나 재미나게 봤었는데, 어떤 놈이 책을 납치해 갔다. 간혹 헌책방에 들를 때마다 미아를 찾는 심정으로 훑었는데, 연이 안 닿고 말았다. 그런 것이 작년 가을에 새로 번역돼서 나왔던 것이다. 알았더라면 겨울은 따뜻하게 다가왔을 것이고 나는 추위를 이유로 나다니지 않을 것을 위로받았을 것이다. 감개무량이다. 읽을 당시의 표현대로라면 따봉인 책이다. 저자가 직접 각색하고 알폰소 아라우가 감독한 영화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정작 이 영화는 못 봤고, 키아누 리부스가 이뻐서 「구름속의 산책」을 엉겁결에 봤다. 아 「달콤 –」 이 영화도 보고 싶다. 어디서 다운받을 수 없을까? 에스키벨의 다른 작품인 『사랑의 법칙/민음사』은 소설만큼이나 CD가 매혹적인데 대체 워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다.
『꿈의 궁전』 이스마일 카다레 (장석훈 옮김) / 문학동네
지난 가을에 번역됐었는데, 역시나 모르고 살았다. 『죽은 군대의 장군』, 『돌에 새긴 연대기』, 『부서진 사월』,『H 서류』 등등이 꽤 오래전 번역됐고 게다가 죄다 재미있다. 외에 ‘2000년 국제문학포럼’의 논문집인 『경계를 넘어 글쓰기』에 아주 짧은 분량의「문학과 삶의 관계」가 실려 있다. 이스마일 카다레는 알바니아의 독재체제하에서 ‘체제에 순응하는 충성스러운 개들을 즐겁게 해줄 만한 그 어떤 것도 담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작품 출판이 금지당했는데, 그가 처했던 상황이나 글쓰기는 아리엘 도르프만과 일면 닿아있다. 그의 책 중 『돌에 새긴 연대기』는 절판이지만 헌책방에서 그나마 자주 보이는 편이고 『죽은 군대의 장군』은 대형 서점 구석에 가면 여전히(?) 구할 수 있고, 나머지 책들이야 맘만 먹는다면!
『이방인, 신, 괴물』 리처드 커니 (이지영 옮김) / 개마고원
『이방인, 신, 괴물』은 그 제목에서 타자의 대표적인 형태를 총괄하고 있다. 레비나스, 데리다, 료타르, 크리스테바, 지젝, 하이데거 등을 아우르며 타자성 연구의 성과를 제시하는데, 리처드 커니는 ‘이방인·신·괴물’을 인간 심리의 심연에 존재하는 균열의 증거로 보고 의식과 무의식, 친숙한 것과 낯선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사이에서 어떻게 분열되는지를 보인다.
20세기 후반 유럽 철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개론서 중 하나가 리처드 커니의 책이다.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와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한울』이 이미 번역됐는데 몇 부분의 오역을 감안하고서래도 읽으면 현대(유럽)철학의 지평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는 총 3부로 사상가들과의 대담으로 이뤄졌다. 말하기는 언제나 쓰기보다 쉽고 명확해 지기 마련이다. 대담은 질문자에 따라서 질 자체가 틀리게 되곤 하는데, 리처드 커니의 질문은 각 사상의 핵심을 가로지르고 있다.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역시 현상학, 비판이론, 구조주의의 훌륭한 주석서이다.
『천구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 실비나 오캄포 (김현균 옮김) / 열림원
숨이 가빠질지도 모른다. 언젠가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선 『탱고』에서 그녀의 「올리세스」를 보며, ‘왜 이런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지 않는 걸까’며 아쉬웠는데 무려 18편의 단편을 만나 볼 수 있다니 기대가 크다. 그녀의 소설은 우리가 생각하는 ‘환상’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주변과 중심이 전복되고 그럼으로써 현실의 불온함과 잔혹성이 ‘아무렇지 않게’ 드러나고 있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박거용 옮김) / 르네상스
가끔 죽은 작가를 선호할 때가 있는데, 더는 그의 책이 나오지 않을 것이고 더 읽지 않아도 되고, 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그 점에서는 꽝이다. 민음사에서 나온 보르헤스 전집은 역자였던 황병하 선생이 고인이 되면서 기획과는 달리 시는 포함되지 않고 따로 시집이 나오는가 하면 『보르헤스의 불교 강의』는 여시아문에서 나오고, 『픽션들/녹진』에 실렸던 산문들도 전집에는 안 보이고, 『상상동물 이야기』는 까치에서 울고, 그것들을 다 해치운 다음에야 전작주의자로서 겨우 안도를 하는데, 별안간 죽은 보르헤스가 문학을 말한 댄다. 뭔가 해서 봤더니, 보르헤스가 하버드에서 강연한 녹취를 풀어 편집한 책이다. 이거 참, 나아아중에 누군가 보르헤스의 전집을 다시 기획한다면 어떨까? 번역을 좀 더 다듬고 소설뿐만 아니라 시와 산문 강연 대담 등을 죄다 엮어서 말이지.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데이비드 하비 (김병화 옮김) / 생각의 나무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등으로 유명한 하비의 책이 새로 나왔다. 나는 그의 책을 겨우 두 권 봤을 뿐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어떤 책보다 명징하게 읽힌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시공간의 배치를 정치경제학적으로 분석해오던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파리’라는 도시공간을 분석했다. 도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자본 순환과정을 가장 고밀도로 집적하여 보여주는 공간이다. 자본이 지리공간에 미치는 영향과 그 지리공간이 다시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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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니 윌리스의 이 두꺼운 책이 부담되시는 분들은 『시간여행 SF 걸작선/고려원』에 실린 「화재 감시원」을 보시라! 죄다 읽고 말 테니. 읽고 싶은데 책을 구할 수 없는 분들은 환상문학웹진에서 볼 수 있다. 다른 멋진 단편들도 덤으로!코니 윌리스의 작품은 외에도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열린책들』와 『세계여성소설걸작선/여성사』에 「섹스 또는 배설」과 「첫사랑」이 실렸고 『마니아를 위한 세계 SF 걸작선』에는 「사랑하는 내 딸들이여」가 실려 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더글라스 애덤스 (김선형, 권진안 옮김) / 책세상
기존에 새와물고기 판으로 4권까지 읽고 5권을 pc통신에서 다운받아 놓고는 말았더랬다. 1978년 BBC 라디오에서 6회짜리 드라마로 시작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엄청난 반향으로 책이며 음반 등등 별의별 것까지 다 나오게 된다. 처음에는 3권 완결이던 것이 팬들의 성화(?)로 어느 날 4권 완결이 되더니 결국 5권까지 나오게 된 책이다. 이런 ‘코믹’이라면 정신없이 웃다가 미쳐도 무죄다! 예전에 읽을 때 어찌나 웃기던지 학교에서 밥 먹다가 갑자기 ‘아서덴트’만 떠올랐을 뿐인데 밥알을 앞 친구에게 다 뱉어 버리고 말았다.(라블레 시대의 사람들도 어쩌면 가르강튀아를 보며 나처럼 뱉었을지도). 올해 영화가 개봉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언제쯤이나 볼 수 있을지, 얼마나 사람들이 볼지도 의문이다. 81년에 BBC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졌고, 그 희귀하고 지루한 영상을 당나귀를 통해서 다운받을 수 있다. 그리고 라디오 방송을 작년인가 다시 했었는데, 듣고 싶은 분들은 여기를! 그나저나 5권만 사면되니깐.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카를로 진즈부르그 (조한욱 옮김) / 길
미시사의 선구자로 일컫는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책이다. 잘 알려진 『치즈와 구더기』보다 10년 앞서 발표됐던 것이고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개작한 것으로 진즈부르그 저술의 출발점으로 알려졌다. 미시사는 아날학파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적 방법론으로 대두됐던 것이다. 당대의 주류였던 프랑스 아날학파는 ‘사건 중심의 역사가 아닌 구조 중심의 역사 서술 방식’을 내세우며 역사 서술의 관점을 ‘낮은 곳’ 으로 끌어내렸지만, 지나친 계량화로 인해 구체적인 ‘인간’ 이 빠진 역사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데 반해 미시사는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의 심성과 문화에 초점을 두면서, ‘역사가들이 침묵 속에 묻어버린’ 에피소드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끄집어내고 있다. 『미시사란 무엇인가』에서 진즈부르그의 민중문화론에 대한 논쟁을 시작으로 미시사에 관심을 뒀는데, 책과 멀찍했던 날들로 알콩한 밤의 재미를 잃었다. 밤 동안에 같이 둥글고 싶은 책이다.
이래저래 새로운 번역본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저작권 때문에 단 한 종의 번역서만 있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번역과 비교해보며 좀 더 정확하고 내 입맛에 맞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래 책들도 사고 싶다.
『포르노그라피아』 , 『페르디두르케』 비톨트 곰브로비치 / 민음사
『생각』 장정일 / 행복한책읽기
『사랑의 야찬』 미셀 투르니에 /문학동네
『정신분석 사전』 장 라플랑슈. 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 열린책들
『열하일기』 박지원 / 보리
『거기 당신?』 윤성희 / 민음사
『빨간 공책』 폴 오스터 / 열린책들
『막간』 버지니아 울프 / 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울나라의 앨리스』 마틴 가드너 주석 / 북폴리오
『다이어리』 척 팔라닉 / 책세상

토너 아저씨

토너 아저씨를 뵙고 왔다. 우리는 흔히 아저씨를 목사님이라고 부른다. 네팔 분 중에서 유일하게 교회에 다니기도 하거니와 술과 담배를 안 하시기 때문이다. 글쎄 그 이유 때문만 인가? 농성 해단식 이후에 교회에서 지내신다지만 예배드리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술은 농성 중에도 어쩌다 슬쩍 하시기도 했으니 이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그러나 넌지시 되돌아보면 389일의 텐트생활이면 지칠 만도 한데 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을 추스르고 일정 정도 긴장을 유지하며 생활하던 모습이 비록 진짜는 아니지만 ‘목사님’이라는 별명은 잘 어울린다. 목사님과는 같이 신문을 읽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신문을 덮고 하시는 말씀이 농성 초창기에 ‘철의 노동자’를 부를 때 ‘민주노총 깃발 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 라고 부르곤 했단다. 언제나 ‘민주노총’의 깃발이 앞에서 펄럭였기 때문에 철썩 같이 자신이 생각한 가사를 믿었고 그처럼 얼마 동안은 민주노총에 대한 신뢰도 대단했었다. ‘했었다’는 비단 목사님뿐만 아니라 많은 이주동지의 현재이다.
농성 이후 아저씨는 며칠을 쉬고 일자리를 찾았는데, 같이 일하는 분들을 보니 월급을 못 받고 있어서 봉사한 셈치고 그냥 나왔었다. 그리고 다시 일자리를 찾았는데, 이번에도 3개월 정도의 월급이 밀려서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있었던 송탄의 한 공장 얘기를 하는데 주로 필리핀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데 월급이 계속 밀려서 그 노동자들이 단체로 사장을 찾아가 월급 얘기를 했단다. 사장이 계속 미루기만 해서 하루 날 잡고 단체로 공장에 나가지 않았더니 그 사장 놈이 컨테이너(이주분들은 공장의 한편에 마련해 놓은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곤 한다.)전기를 다 끊어버려서 그 추운 날 오도 가도 못하고 밖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는 게다. 한겨울에 냉동실에 가둬 둬야 정신을 차릴 놈이다.
일 때문에 오래 뵙지는 못하고 다음 주 토요일에 다시 뵙기로 했다. 다음에는 인터뷰를 약속했는데, 농성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듣기로 했다. 농성 해단식 이후 벌써 4개월 가까이 지났지만 농성장 차원에서도 이주지부에서도 어디서도 이렇다 할 평가가 나오지 않고 있다. 원래는 연대단위로서의 농성평가 같은 것을 쓰려고 했는데, 그보다는 직접 이주분들의 말을 듣는 게 좋겠다 싶어서 방향을 틀었다. 바깥에 알리는 그럴싸하고 짠한 평가 말고 실제로 어떤 헤게모니가 작용했던 가와, 그 안에서의 한국 활동가나 연대단위, 혹은 이주 동지들끼리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이미 라디카(네팔)와 마숨(방글라데시)을 인터뷰했는데 녹취 푸는 게 녹록지 않다. 목사님과 헤미니(네팔) 마붑(방글라데시)과 만나기로 했고, 현재 수도권 노조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과도 얘기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누구보다 소하나(인도네시아)와 얘기하고 싶다. 라디카와도 얘기를 했지만 여성이 가진 내부적 갈등은 훨씬 심했을 것이다. 농성장에 여성 공간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감내해야 할 것들은 외부와의 싸움 못지않게, 어쩌면 보다 더 중요한 문제이고 강한 억압이었는지 말하고 싶다. 이리 주절주절 계획을 풀어보는 것은 ‘하기’ 위해서이다. 생각만 하다 말게 아니라 꼭 해야지 싶어서 일정 강제하는 것이다.

배지 구경하세요~

배지
이주노동자합법화를위한모임에서 이번에 찍을 배지와 이전 배지들입니다.
1, 5는 새로 찍을 배지이고, 4번은 가장 단명한 배지이기에 아마도 귀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 7은 명동성당 농성단 대표였던 샤말타파입니다. 작년 2월에 출입국에 잡히고 4월에 강제출국 당했답니다. 이미 나와 있는 배지의 수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앞으로 찍을 계획이 없습니다. 곧 귀해지겠죠? ;; 3번과 6번이 가장 인기가 좋았던 것 같아요. 3번은 그물총을 쏘는 출립국관리소에게 똥침을 놓는 모습이고, 6번은 여성이주노동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여성’과 ‘이주노동자’가 더해지면 이 사회에선 없는 존재처럼 돼버리곤 합니다. 중심에서 가장 멀리 있죠.
3개에 2천원입니다. 배달은 안 되고 집회에서만 살 수 있습니다. 대량구입 하신다면 배송도 고려를 ;;; 물론 더 비싸게 주고 사는 것은 환영입니다. 수익금은 이주노동자 후원을 위해 쓰입니다.
이쁜 걸 찜해두시고, 귀한 게 뭘까 생각해보시고, 선택하시는 거예요.
조만간은 19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4시부터 6시까지 열리는 평화를위한난장과
20일 역시 대학로에서 열리는 320반전집회에서 살 수 있습니다. 마구마구 사세요 ~

MB아저씨 면회

b님은 3.20 관련해서 얼마 전 한겨레에서 본 기사를 얘기한다. “스크린 앞에서 죽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하다”라는 요지의 소말리아 관련 기사였나 보다. 어떤 글인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지만 찾을 수 없다. 전쟁도 일상도 어느 하나가 부각되면 그와 동질의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소한’이라는 레토릭으로 감춰진다. 그러나 어딘가에 중심을 실어 주는 것은 그것이 상대적으로 다른 부분의 소외를 가져온다고 할지라도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데 있다. 어떤 현상이나 세계를 안다는 것은 단순한 외적발견이나 관찰에 의해서만 이뤄 어질 수 없다. 발견과 관찰로 이루어진 세계는 그것이 유토피아든 척박한 디스토피아든 판타지일 뿐이다. 그 세계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세계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 그러고 나서 ‘안다고 믿던’ 세계와 비교해 볼 일이다.
오늘 MB아저씨 면회를 다녀왔다. MB아저씨는 389일간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을 했던 네팔 노동자다. 출입국에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게 금요일이다. 토요일 일요일은 면회가 안 돼서 오늘에야 가게 됐는데 오늘 못 갔으면 크게 서운했을 것이다. 어디로 이송됐는지를 몰라서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아침에야 ‘목동출입국관리소’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인은 아무도 오지 않았었고 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만이 다녀갔단다. 섭섭하고 그보다 야속했을 것이다. 그도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투쟁하던 사람이다. 이주지부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관심을 가졌어야 할 일이다. 자히드의 눈물과 MB아저씨의 눈물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 그 눈물을 구분 짖는 것이야 말로 형평의 문제이다.
라쥬형과 통화를 하는데, 이주지부의 누군가가 아침에 ‘화성보호소’에 다녀왔단다. 그 사람에게 나는 면회가 끝난 직후 전화를 했었다. ‘MB동지는 목동에 있고 내일 추방이라 오늘 말고는 면회를 할 수 없다’, 그는 “화성에 있는 게 아니라 목동에 있나요?”라고 물었다. 다녀왔으면 알 일이다. 토너아저씨와도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아저씨는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묻는다. 나는 후딱 ‘그냥 잘 지내요’라고 답한다. 두고두고 곱씹어 봐야겠다. 그 인사에 정확히 답하고 싶다. 늦더라도.

하루 전 날

내일 고려대 학생회관식당에서 “수도권 노조” 기금 마련을 위한 이주노동자 후원 주점이 있다. “이주노동자합법화를위한모임(이하 지지모임)“에서는 ‘자히드 후원’을 위한 부스를 차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배지를 팔고 모금함과 유인물 대자보 피켓 등등을 준비하고 다른 단위와 함께 할 수 있는 수익 사업을 찾고 있었다. 부랴부랴 이것저것 준비를 하는 와중에 상당히 당황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부스는 차리되 모금함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느 연대단위에서 CD판매를 하겠다는 계획을 주최 측에 전달했더니 이주지부의 설명은 ‘근 몇 달간 여러 단체에서 이주문제를 가지고 주점을 열었다. 주점에 참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외부의 시선은 그 단체를 구분 지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뭉뚱그려 이주지부로 인식한다. 이주지부는 이렇게 자주 주점을 여는데 그 수익금으로 대체 뭘 하냐는 구설수가 생긴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모금함이 주점 내에서 돌 때 주점에 있는 사람들이 부담을 갖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부터 기가 찬다. 분명히 다른 단체에서 다른 타이틀을 가지고 주점을 열었을 테고 그렇다면 그 주점으로 얼마의 수익이 생겼고, 그 사용 내역이 어떻다는 것을 공개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그런 구설수가 두려 울리도 없고 애초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모금함이 주점 내에서 도는 것이 부담스럽다? 주점 티켓을 팔거나 물건을 파는 것은 부담이 아니고 모금함은 부담스럽다는 말인가? 주점 티켓부터 시작해서 어느 것도 강제적이지 않다. 부담되면 물건을 안사고 모금함에 돈을 안 넣으면 그만인 것이다. 누군가는 분명히 돕고 싶어 할 것이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연대하듯 우리는 자발적 연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 활동가중 누군가는 “지지모임에서 ‘자히드 후원’을 타이틀로 부스를 차린다는데, 여러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자히드 문제”에 대한 정리가 안 됐다”는 말을 전했단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들이 의견을 통일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그 갈등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을 헷갈려하는 동지들도 있을 테고, 형평성을 들며 누구는 하고 누구는 안하냐는 문제로 고민하는 동지들도 있을 것이다. 자히드는 분명 이주지부의 조합원이다. 조합원이 강제추방 당하고 그로 고통 받고 있다면 이주지부 차원에서 먼저 나서서 어떤 행동이든 취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도 돕고 싶지만 ”개인의 일“인지라 조직차원에서 끌고 가기에는 여러모로 부담이 된다기에 지지모임과 다른 연대단위가 ‘자히드 후원 사업‘을 계획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지모임이나 다른 연대단위가 왜 자히드 돕기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동의는 어렵더라도 이해를 구한다고 하면 될 것을 동지들의 입장이 아직 정리가 안 됐다는 말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다.
형평성의 문제도 그렇다. 애초 누구는 돕지 않았으니 끝까지 돕지 말자는 말인가? 그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형평인가? 우리는 늦었더라도 시작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까지일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우리 중 누구든 자히드와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 때 우리는 혼자여야 하는가? 우리가 공동체를 만들고 노조를 만들고 모임을 꾸린 이유는 어려울 때 함께 하자는 더디더라도 서로의 고통을 맞들며 가자는 뜻이지 않던가.
우리는 언제나 추상과 싸워 와서 구체적인 현실이 닥쳐서는 이게 저건지 그것인지 분간을 못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등등의 말은 한 없이 추상적이다. 우리가 바꾸자는 것은 바로 개개인들의 삶이 아니던가. 고통은 바로 그 개인들의 삶속에 있는 게 아니었던가? 우리가 말하는 연대하자는 개인적 고통이란 ‘사랑의 열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숨 쉬는 아주 기본적인 권리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는 언제나 개인의 모습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트라 켈리의 말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압축하고 있다. 투쟁은 영역의 구분을 넘어서는 데에서 비로소 시작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야 질기게 간다는 것을, 그래야 희망이 보인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가? 대체 사적과 공적의 구분은 어디서 어디까지이며 누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가? 당신들은 정말로 사적 영역에서는 고통을 받고 그와 분리된 공적인 영역에서 운동을 한다는 말인가?
이런 소모적 언쟁이 필요한 게 아니라 어느 단위에서 함께 한다는 소리에 탄성을 질렀어야했을 밤이다. 주점 전날 이란 말이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다

2003년 11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명동성당 들머리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이 있었다. 1년이 넘는 농성투쟁이 끝났을 때 그들에겐 지친 몸을 추스를 방 한 칸은 고사하고 먹을 쌀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혹독한 겨울의 그 기억들을 견뎌내고 속속 다시 공장으로 일터로 돌아가지만, 정작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단속추방이라는 보다 더 무지막지한 현실이다. 그렇게 자히드가 끌려가 추방당했고, 그제 MB아저씨가 잡혀서 화성보호소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들은 명동성당 농성장을 끝까지 지켰던 분들이다. 이상한 체감이다. 단속추방이라는 말이 몇몇 사건으로 사람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내내 외치던 “단속추방 박살내자”가 보다 절실해 진다. 내 구호로는 막아내지 못한 것, 우리의 구호로 지키지 못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인 것이다.
한국정부의 ‘고용허가제’ 시행 후 소위 말하는 ‘불법체류자’는 작년 이맘때쯤 정부 발표로 13만 7천명에서 18만 7천명으로 무려 5만명 이상이 늘었다. 한국정부는 고용허가제가 실시되면 불법체류자가 10만명 이하로 줄어들 것이라고 떠버리며 무자비하게 단속추방만을 강행하고 있으나 이 법안은 명백한 실패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2005년 내에 비자가 만료되는 이주노동자가 13만 9천명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고용허가제’와 ‘산업연수생제’로 인해 불법체류자로 전락할 것이고 올 하반기에 들어서는 미등록이주노동자가 20만명을 훌쩍 넘어설 것이다. 노동부와 법무부는 고용허가제와 산업연수생제의 과오를 인정하고 법안을 새로 책정하는데 애쓰는 것이 아니라 “불법체류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과 엄한 처벌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만을 보이고 있다. 대체 20만명을 어떻게 단속하겠다는 것인지도 의문이며, 그 단속 속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침해를 쉬쉬 덮어놓고 가겠다는 심사를 모르겠다. 얼마 전 화성보호소에 갔더니 앞에 대문짝만하게 “불법체류자 고용은 인권침해의 시작입니다“라고 붙여 놨더라. 지랄. 인권침해의 시작은 산업연수생제를 고수하는 한국정부와 기업들에게 있다는 것은 출입국관리소 개도 알 일이다. 엄연히 이땅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를 허벌나게 싼 노동력으로만 여기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폐기 처분해 버리는 일이야말로 인권침해의 시작이란 말이다. 나와 색깔이 다르니 상관없다고? 출입국관리소는 색깔구분도 엄정히 하더라. 출입국에서 단속을 할 때 일본인이나 백인이 체류기한이 지났더라도 무자비하게 잡아서 보호소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출국 권고를 한다.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산재 치료 중 비자기한이 끝나 체류연장 신청을 했을 때, 체류보험금 1000만원을 내라는 것과 대조적이지 않은가? 영장 없이 마구잡이로 들이쳐서 끌고 가는 필리핀 노동자들과 대조적이지 않은가? 한국정부가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는 노말헥산에 중독된 태국여성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압축돼 나타나고 있다.
고용허가제는 또 어떤가?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현대판 노예제도라 비판 할 때마다 다른 나라도 똑 같다고 뻥치는 인간들을 상대로 이제는 더 말하기 짜증난다. 그 나라의 대부분은 몇 년 동안 한 사업장내에서 일했을 경우, 자동으로 노동비자가 연장된다거나 후에 영주권까지 받을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4년이 지나면 무조건 불법이 되고 추방당해야 하는 한국과는 비교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괴테의 말을 비틀어 “태초에 사람이 있었다.” 그것이 정책을 만드는데 기초가 되어야하며 사람을 대하는 태도여야 마땅하다.
시행된 정책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싹 들어 바꿀 수 없다면 보완이라도 해야 할 일이다. 그 보완이란 것이 ‘단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강행하는 어리석음은 대체 어디서 기인할까? 미스테리한 인간들이다.

국민은행 (국민카드)의 어이 없음

공과금 납부 때문에 은행에 갔다. 2,3분이면 끝났을 일을 장작 1시간 동안이나 직원과 실랑이가 있었다. 요 며칠 전까지 잘 쓰던 현금인출카드가 계속 오류가 나기에 직원에게 문의했더니, 다른 창구로 가보란다. 가서 기다렸다가 문제를 얘기했더니, 해지된 카드란다. 얼마 전까지 썼던 카드이고, 더욱이 해지한 사실이 없다고 했더니, 전산상으로는 해지 됐다고 나온단다. 그것도 2002년에 해지 됐다고 말한다. 해지 된 카드로 입출금이 가능한지를 물었는데, 카드 담당자와 얘기하더니 가능하단다. 거참. 설사 내가 벌건 대낮에 몽유병자처럼 빤쓰만 입고 와서 해지했다고 치자. 그럼 인제 와서 안 되는 이유는 무얼까? 게다가 해지된 카드로 입출금하고 교통카드로 쓸 수 있다?? 있단다.
얼마 전에 국민은행에 새로운 통장을 만들었다. 통장을 개설하면서 체크카드를 만들었는데, 이전에 내가 쓰던 모든 카드가 새로운 통장과 연결된다는 게다. 물론 그 통장을 개설할 당시 그런 설명을 듣지 못했다. 내가 국민은행에 관련돼서 뭔가를 해지한 것은 신용카드밖에 없다고 하니, 틱틱틱 자판을 두드리면서 신용카드는 2003년에 해지했단다. 직원 말로는 내 현금인출카드는 2002년에 해지 됐고, 신용카드는 2003년에 해지 됐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내 잘 쓰던 캐쉬카드는 새로운 통장과 연결됐다는 것이다. 별 수 없이 새로운 현금카드를 만들어야 한다기에, 그러자고 했다. 그러면서 내 원래 카드를 가위로 싹둑 자른다. 뭔가를 쓰고 신분확인을 하고 이제 카드를 받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직원이 수수료가 2,000원인데 어떻게 할지 묻는다. 이봐 당신 내가 얼마나 쪼잔 한지 알아! 얼굴은 굳어졌을 테고 목소리를 조금 떨면서 내가 왜 수수료를 물어야 하는지 하나하나 따졌다. 직원은 수수료를 면제해 주겠단다.
2002년에 내가 해지한 것은 신용카드였다. 신용카드를 두 개나 가지고 다닐 이유가 없었기에 해지한 것인데, 2003년에 떡하니 연회비가 통장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국민카드사로 전화해서 이 카드를 2002년에 해지했고, 지난 1년 동안 사용한 적이 없다고 했더니, 처리가 안 됐었나 보다며 해지를 해 줬고, 연회비는 다시 통장으로 입금됐었다.
그렇다면, 2002년에 어떤 얼뻥한 직원이 신용카드를 해지한 것이 아니라, 내 캐쉬카드를 해지한 것이었을 테고, 신용카드는 유효기간을 기다리며 누가 지를 박박 긁어 주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래 은행직원도 카드사 직원도 사람이니 실수는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앞에서 얼빵하다고 말한 거 취소할 게.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해지된 카드가 만 3년이 넘게 쓰이고 있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국민은행이나 국민카드사이다.
전산상으로 해지 된 카드를 교통카드로 이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전산상의 기록으로 내 교통카드로 나간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건 사실 고객님이 쓴 것이니 내야지 않느냐 한다. 물론 그래야 하는데, 만약 내가 카드를 분실했고, 분실신고를 통해서 카드를 해지했는데, 누군가 내 카드를 주웠다. 그 주운 카드를 교통카드로 이용했다면? 카드사에 의뢰해서 돈을 돌려받는단다. 카드 주운 놈은 계속 교통카드로 이용할 수 있는지는 안 물어봤다. 애초 카드를 해지했으면 현금인출이든 교통카드든 다 안 돼야 정상 아니야?

자히드를 도웁시다

자히드
1년이 넘는 동안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을 해왔던 자히드는 농성단 해단식 이후 경찰에 잡혀 강제출국을 당한 이주노동자입니다. 그의 귀향을 맞이한 것은 오랜 농성으로 지친 몸을 추스를 수 있는 집이 아니라 가난과 질병으로 허덕이는 고통이었고, 오랜 타향살이를 귀담아주는 친구들의 웃음이 아니라 빚쟁이들의 성화가 먼저였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희망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몇 년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의 무게였습니다. 자히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현실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가 한국에서의 투쟁을 반성하고 후회하고 자책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투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억눌린 현실과 싸울 수 있는 힘이 되어야하지 않습니까. 비록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히드의 투쟁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있어 고맙습니다. 동지들의 연대가 투쟁의 힘이 됩니다.”라고 말하던 자히드의 소리가 동지들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히드의 또 다른 투쟁에 연대해야 할 때입니다. 그가 있는 곳이 한국땅이 아니지만, 그의 싸움이 노동현실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는 보다 힘든 생존과 맞닥뜨려 홀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입니다. 자히드가 당면한 현실을 타파하는 것이 우리가 투쟁하고 연대하는 이유가 아니었습니까. 동지들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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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히드를 돕는가?
2003년 겨울부터 2004년 겨울의 끝 무렵까지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농성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1년이 넘는 투쟁을 해왔던 이주노동자들이 농성을 접었을 때 그들이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지쳐버린 몸을 뉘일 방 한 칸도 없었고, 당장 생활을 이어나갈 돈도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정부로부터 어떤 호의적인 조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빈털터리인 채 한국 사회 속으로 다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농성을 정리하려고 어수선하던 그때 자히드가 붙잡혀 강제출국 조치를 당했습니다. 자히드는 2003년 겨울 농성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명동성당 들머리를 지키고 있었던 노동자입니다. 자기 의지로 투쟁을 시작했고 자기 의지로 농성투쟁을 정리하고자 했지만, 그는 마지막을 보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것으로 우리-이주노동자 투쟁에 관심을 가졌던 한국 사람들-와 자히드의 관계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자히드는 곧 기억 속에서만 만나는 인물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였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지옥을 의미합니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사회 속에서 숨어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말합니다. 귀향은 서글프게도 우리 한국 사람이 전통적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오만하게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도 없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자히드의 삶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한국에서 불의에 맞서 투쟁했던 대가를 고향에서 치르는 중입니다. 한국에 돈벌러간 아들을 믿고 빚더미에 앉은 가족-당연하게도 자히드는 농성투쟁을 하는 동안 자기가 모았던 돈을 다 썼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임금상황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난 부채, 빚쟁이들의 협박, 곱지 않는 이웃의 시선들이 그를 옥죄고 있는 것입니다. ‘말해요, 찬드라’가 생각납니다. 찬드라는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오늘 자히드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 아니면 저기 어디에선가 삶이 계속되듯이 고통, 불안, 회한, 가난, 질병도 계속 됩니다. 자히드는 여전히 투쟁 중입니다. 고통, 불안, 회한, 가난, 질병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이 당면한 현실입니다. 특히 자히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현실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가 한국에서의 투쟁을 반성하고, 후회하고, 자아비판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가 자기기만, 자기부정의 혼란 속에서 살아야만 할까요? 이런 질문들이 우리를 다시 자히드와 연결시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자히드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조그만 힘이라도 보탤 생각입니다.
왜 ‘자히드’인가? 농성투쟁을 하다가 강제출국 당한 노동자가 자히드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심으로는 그런 이주노동자 모두를 지원하고 연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자히드를 지원하는 것이 귀향한 노동자와 연대하는 아주 작은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지원하는 움직임이 한국사회에서 아주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히드와 같은 당면 문제를 ‘개인의 문제’나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공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히드가 당면한 문제가 정말 사적인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들 삶의 사적 영역에서 고통 받고, 그것과 분리된 공적인 다른 영역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운동을 하거나 투쟁을 해야 하는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외부에 있는 어떤 누군가의 초월적 지상 명령 때문에 우리가 투쟁을 한다고 상상하고 있는 겁니까? 고통은 사적이지 않을 뿐더러, 사적인 것과 무관한 공적 목적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회피하는 공적 목적이란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동안 ‘사적인 것’이라 치부하고 밀쳐두었던 그 말을 끌어내고, 그 말을 듣는 능력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지지를 보내며, 연대를 하는 모임이나 활동들이 더욱 다양해지고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귀향한 이주노동자와 연대하는 것도 그런 활동 중의 하나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말을 잃은 귀향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합시다. 그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모아 줍시다.
*** 자히드 돕기 모금은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모임’ 통장으로 해주세요.
국민은행 843101-04-026848 임윤희

일하기 싫어

7년째 일을 한다. 몇 달만 하고 말자며 시작했던 일인데 돌아보면 끔찍이도 오래다. 일주일에 두 번 많게는 세 번, 밤새 일을 하는데 올 때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첫 몇 년은 날을 새고 잠을 청하지 않고도 학교 수업을 별 탈 없이 마치고 다른 날보다 일찍 잠을 자는 정도였다. 수업 시간에 졸지도 않고 머리가 멍한 일도 없고 피곤이 일상에 미치는 탈은 없었다. 한 3년 전부터는 수업시간에 가끔 졸고, 제 작년에는 급기야 세미나 중에 졸다가 교수님께서 가서 세수하고 오라는 말까지 들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결국 교수님께서 일을 당장 그만두라는 말씀까지 건 낸다. 서로에게 쉽지 않은 말이지만 좀 더 몸을 추슬러야지 하고는 말았다. 작년엔 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일을 끝내고 학교에 가면 점심 무렵부터는 약 먹은 닭이 되고, 해거름 무렵이면 땅바닥에 마냥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기가 싫은 것이다. 가까스로 집에 오긴 하는데, 잠들면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어진다. 결국 일을 마친 뒤 조금씩 선잠을 청하곤 했는데, 이걸 조절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갈수록 엉망이다. 몸의 리듬이 뒤죽박죽이 되고 생활 패턴도 마냥 따라가는 것이 꼴사납다.
잠시 쉬는 시간이다. 피곤이 잠을 짓이긴다. 1년 중 일이 가장 많은 날이라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는데, 쌓여 있는 일을 보자면 정말로 진심으로 온몸으로 도망가고 싶다.
열심히 산다고들 착각하겠다. 그냥 투정일 뿐이다. 날마다 미친 듯이 빈둥거리고 싶다. 게으르고 느리게 뒤룩뒤룩 시간과 둥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