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홍이와 북한산에 다녀왔다. 구기터널 방면으로 올라서 비봉을 지나고 승가사 쪽으로 내려왔다. 좀 더 긴 산행을 즐기고 싶었는데, 아이젠을 미처 준비 못 해서 아쉽지만 일찍 맺음을 한다. 오늘 산행 코스는 처음이었는데, 한강과 일산이 훤하게 들어온다. 산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먼 미래의 도시 같다. 그것이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그를 결정하는 것이 도시의 외양은 아닐 것이다. 집에 오는 길에 신촌에 들렀고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비터문』과 프랑코 페루치의『내가 신이다』를 샀다. 브뤼크네르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고 있자면 숨이 가빠오며 귀 아래 맥박이 한없이 두근거리곤 한다. 그는 단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로만 폴란스키의 “비터문”의 원작이 브뤼크네르의 소설이다. “영화는 고교시절에 봤었는데, 역시 재홍과 함께였다.”고 십몇 년이 넘게 믿고 있었다. 소설을 훑어보는데,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어라 내가 정말 이 영화를 봤던 것일까? 갑자기 내가 알고 경험했다고 믿던 사실이 불안해진다. 재홍아 우린 정말 이 영화를 봤었니? 아니면 영화가 원작에서 많이 각색된 것일까?
『내가 신이다』는 ‘나는 종종 내가 신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 하지만 나는 원래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기억은 제멋대로 왔다가 가버린다.’로 시작하고 있다. 단 두 줄 만 가지고도 마구 설렌다. 마저 읽기를 마쳐야 하는 것들을 끝내자마자 『비터문』과 『내가 신이다』를 볼 셈이다.
집에 돌아오니 5시 30분쯤 됐었나? 스터디 준비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중간에 몇 번 깼던 것도 같은데 모르겠다. 일어나니 3시를 지나고 있다. 무언가 꿈인지 생신지 도통 구분을 못하겠어 서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혹시 내 문자 보낸 거 받았어? 나는 분명 문자를 보냈다. 이건 너무도 생생하다. 문자가 온 적이 없단다. 이건 꿈이었을까? 아니면 문자가 단지 어떤 이유로 안 갔을 뿐일까? 내가 그 잠깐 머물던 곳은 어디일까? 기억은 제멋대로 왔다가 가버린다? 이 기억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중학교 때였다. 시험기간이라 날 새며 벼락치기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와 별로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쓰윽 눈인사만 하고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내 어깨를 두어 번 치면서 ‘열심히 하렴’ 이라는 말을 하고 방을 나가는 것이었다. 아침께 어머님께서 밥을 챙기시는데 ‘아빠는요?“라고 물었다. 어머님은 어젯밤에 아빠가 집에 안 들어왔다고 말씀하신다. 그건 단순히 꿈이었을까? 나는 졸지도 않았고 잠을 자지도 않았고, 내내 멀쩡했는데 말이다. 대체 내게 기억이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어쩌면 기억이란 결정불가능의 영역에서 그 경계의 틈에서 살아가는 것들이 아닐까? 제멋대로 말이지.
[작성자:] 부깽
『러시아 인형』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책 분류를 꽤 잘해놓은 편이다. 밖에서도 어떤 책이든 꽂혀 있는 위치를 가늠할 수 있고 뭔가 필요한 책이 있으면 전화를 해서 동생이나 어머니께 책의 안부를 묻곤 한다. 이 안부란 그 책이 과연 책장 어디쯤 지금 있느냐 없느냐부터 책의 저자나 출판사가 어딘지 번역자가 누구인지 등등 책의 전반적인 것을 포함한다. 『러시아 인형』에 대해 몇 가지 확인이 필요해서 책을 찾기 시작했다. 당연히 꽂혀 있어야 할 곳에 책이 없다. 남미 문학이 있는 곳을 주의 깊게 살폈는데도 찾질 못하고, 혹시나 싶어 대산 문학총서가 몇 권 따로 있는 곳을 찾아봐도 나타나질 않는다. 동생에게 혹시 가져갔느냐고 물어도 무슨 책 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대상이 명확히 기억나지 않을 땐, 주변을 떠올려 보곤 한다. 주변을 기억하는 것은 흡사 최면 같은 것인데 곰곰이 연상되는 것을 쫓아간다. 그건 색이기도 하고 소리이기도 하며, 때론 냄새이기도 하다. 러시아 인형을 산 날부터 시작해보자. 언제였을까? 날이 더워서 창문을 열어뒀던 것 같다. 왕파리가 날아들어 벽천장이고 어디고 할 것 없이 격렬하게 몸을 들이박는 것이다. 소리가 너무 거슬려서 읽던 책을 침대맡에 두고 한참을 파리 잡기와 씨름했던 듯싶다. 그리고 책읽기를 계속 했는지 어쨌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 이후부터 그 책의 행방을 잃었던 걸까? 찬찬히 며칠 전을 떠올려 보는데, 책장에 빈틈이란 분명히 없었다. 그럼 그 며칠 전까지는 분명히 꽂혀 있었단 얘긴데, 아니 어쩌면 그 즈음에 『러시아 인형』의 자리에 다른 책이 꽂혔을 수도 있다. 몇몇 단편의 줄거리가 기억에 있는 걸 보니 이후에도 읽었던 것 같다. 보다 뒤에 긴소매를 입고 다닐 적에 전철에서 책을 펼쳤던 기억이 난다. 뭔가 짐을 들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빨래 더미였나? 빨래를 들고 갔다면 명동이었을 테고, 소란스럽고 역한 고기냄새가 있었다. 그럼 아마도 집에 오는 길이었을 테니 어딘가 밖에 흘렸을 리는 없다. 가방에 책을 넣고, 그 즈음에 메던 가방을 열어봤다. 텅 비어 있고 웬 유인물만 꾸깃꾸깃하다. 아니야, 너무 먼 시간이야. 요즈음에 방문객들이 잦았다. 그 중 몇은 책장에서 책들을 빼냈었고, 그때쯤일 수 있겠구나. 책이 빡빡이 꽂혀 있어서 내가 꼽겠다고 했던 책들이 몇 권 있다. 책상 위에 널 부러 놨는데, 그 틈에 있을 수도 있다. 책상 위에 온갖 잡동사니와 있던 책들은 대강대강 자리를 잡게 하고 한쪽 틈에 쌓아 두었다. 내 키를 한 뼘보다 크게 넘겼으니 족히 2미터는 쌓았나 보다. 찬찬히 제목을 본다. 없다. 이젠 슬슬 짜증이 치민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나중에 찾자 나중에 아침에 일어나면 보일 거야. 지가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한동안 침대 위에도 책이 뒤엉켜 있었다. 그렇다면 방을 치울 때 제일 먼저 침대를 청소하지 않았었나. 침대를 들어 올렸다. 벽면 쪽에서 황지우의 『나는 어느날…』이 먼지를 뒤집고 있다. 황지우는 그닥 반갑지 않다.
『러시아 인형』은 어디로 간 것일까?
황지우 시집의 먼지를 닦고 꽂으려는데 떡 하니 『러시아 인형』이 몇몇 소설들과 같이 뉘어 있다. 침대를 정리하면서 쌓였던 책을 침대 위 책장에 올려놓고는 말았었던 것이다. 다른 책 덮개에 가려져 있어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냄새도 색도 소리도 필요 없다. 차라리 안경을 닦고 좀 더 침착해지면 그뿐이다.
아 행복해!
아무리 많이 먹고 날마다 디비자고 온갖 게으름을 달고 다녀도 살이 찌기는커녕 배조차 안 나온다. 물론 삼시세끼는 꼭 챙기고 간식은 물론이고 야참도 거르지 않는다. 몸무게는 61kg에서 왔다갔다, 춥다는 이유로 운동을 안 하면서 빠진 살이 2kg 정도. 야밤에 라면이 먹고 싶어서 양은냄비에 물을 올렸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천장을 두 번 보고 책장을 쓰윽 훑고 나면 물은 지글지글 끓는다. 마침 동생이 들어오기에 라면 먹을래? 그랬더니 라면이 없을 텐데 그런다. 날은 춥고(이런 날은 담배 사로도 안 나간다) 어쩔까 하다가 어느 날 한 개 반을 끓이고 남은 반쪽이 싱크대 구석에서 뒹굴고 있다는 생각이 번뜩인다. 있다 있어 찾았다. 반도 안 되는 양이지만 양념을 하고 모자란 면은 국수로 대신한다. 청양고추를 가위로 싹둑싹둑 오려 넣고, 파를 한 움큼 집어넣고, 달걀은 고민하다가 살려두기로 한다. 면은 쫄깃쫄깃 국물은 크흐 얼큰하고 딱 이다. 허기가 귀까지 올라 꼬르륵거린다. 상을 차리고 김치를 내고 젓가락을 챙기고 찌게 받침을 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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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맨손으로 양은냄비를 잡았다. 뜨겁다. 라면을 바닥에 엎었다. 형광등이 노랗다. 장판 사이에서 면은 빛나고 국물은 냉장고 밑으로 겨 들어간다. 흠 흠 고민을 두 번쯤하고 에라 모르겠다며 김치 통을 연다. 젓가락을 들고 바닥의 면들을 후르륵 쩝쩝 삼킨다. 자세가 조금 불편하지만 그래도 역시 맛있다. 다른 때와 달리 머리카락을 골라내야 하는 긴장감도 있다. 아직도 열이 가시지 않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한 줄의 면도 놓치지 않는다. 아 역시 맛있다. 밥을 못 말아 먹은 게 아쉬울 뿐. 손은 뭐 조금 지나니 살만하다. 배가 슬슬 불러온다. 배부를 땐 탄성을 지르자. 아 행복해!.
그렇게 혹은 이렇게 살던 방을 치웠다. 사논지 두 달이 다 된 스팀 청소기를 처음 썼다. 방바닥에 윤이 난다. 태고 적 빛깔을 되찾은 듯싶다. 책장을 구석구석 닦고 책에 쌓였던 먼지를 털어내고 하는 김에 책들의 위치도 조금 바꿔준다. 침대를 들어내고 먼지를 쓸어낸다. 어느 구석에서 땅콩 껍질이 나온다. 작년 단오 때 먹은 흔적일 게다. 방을 치우다 보니 동이 튼다. 갓밝이를 또렷하게 마주하기는 꽤 오랜만이다. 내게 방은 세계다. 세계가 변했으니 몸도 따라갈밖에, 목욕재계를 하고 책상에 앉아 끔찍하게 오랜만에 내 공부를 한다. 오전에 과외가 있다. 시간은 또 앞질러간다. 늦을라 싶어 일찍 집을 나선다. 아차차 작년에 여름이었나 가을이었나 빌린 [오후] 여섯 권을 돌려주기로 했다. 잊어선 안 되지. 꽤나 무거워서 세 권은 가방에 세 권은 쇼핑백에 넣는다. 어제보다는 덜 춥다. 룰루랄라 지하철을 탄다. 일요일 오전 사람이 적다. 신도림도 한산하다. 청량리행 전철을 타고 자리에 앉아서 [오후]를 들춰본다. 요시나가 후미는 봐도 봐도 좋다. 대방을 지난다. 윙~~윙~~ 어라 문자가 왔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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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죄뭉합대 월요일날해요 ;”
이럴 순 없는 거야! 라면은 주워 먹기라도 하지. ;;
되돌아보기
신촌에서의 약속 장소는 언제나 숨어있는책으로 한다. 공간의 익숙함은 시간이 주는 초조함을 씻긴다. 책장을 훑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Le paroxyste indifférent 』, 『Fragments – Cool Memories 3 』을 골라둔다. 『단상 – 차가운 기억들』은 번역이 안 됐던 것 같고, 『무관심의 절정』은 이은민 씨 번역으로 동문선에서 출간됐다. 원서는 들추다가 손에서 버려지곤 하는데, 찬찬히 끝까지 읽어볼 요량으로 샀다. 그리고 하나 더 대니얼 대닛의 『의식의 과학적 탐구』를 샀다. 정식으로 출판된 책은 아니고 아카넷에서 석학연속강좌를 기획하며 냈던 책자이다. 4편의 세미나와 2편의 강연이 실려 있다. (필히 리뷰를!) 나름대로 수확인데, 꽤 오래지만 대니얼 대닛의 『마음의 진화』를 너무나 재미나게 읽었던 참으로 슬쩍 기대가 된다.
며칠 간 생각한 문제가 있었다. 함께 모임을 꾸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 나는 선뜻 동의를 못했다. 내게 질문을 하나씩 던져 본다. 이 질문들은 나를 가름할 수 있는 한 척도가 됐다. 내가 망설였던 것은 ‘개인의 일과 공공의 일이 나뉘는가?’의 문제였는데, 이를 되짚으면서 실상 어떤 활동이든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로 모돌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얻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이 생각하면 할수록 마땅히 해야 할 일이더라. 나는 내내 내 편협함을 ‘사적’이란 말에 감추고 있었나보다.
reBlog를 어떻게 활용할까 싶었는데, ‘페미니즘’과 ‘이주노동자’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눠서 글들을 모으면 좋은 자료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tpl파일 하나를 수정해서 refeed내에서 바로 reblog에 글을 등록할 수 있게 했더니 여러모로 편하다.
종일 다시 라블레를 읽는다. 정말 읽기도 위로가 되더라.
MovableType 홈페이지가 리뉴얼 됐다. 훨씬 이쁘다.
이주분들과의 식사
명동성당에서 389일간 농성투쟁을 한 동지들이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큰 족적이 아니래도 스스로 변해가던 동지들. 동지들이 힘이 된다고 늘 고마움을 전하던 분들. 그러나 보다 많이 내게 힘이 되었던 분들, ‘동지’라는 말보다 아저씨 형 누나로 익숙한 분들. 농성 해단식 이후 자주 뵙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식사를 마님이 먼저 제안했었나. 며칠씩 골머리를 알아가며 겨우겨우 일 하나를 치른다. 조금 다른 상황이지만 1년이 넘는 농성동안 한 주도 빼지 않고 한 끼 식사를 준비했던 투밥의 노고가 얼마나 대단한지 진속에 베인다. 투정이 아니라 힘들더라.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고, 별 여력도 없었지만 눈인사만으로도 반갑다. 실은 난 그 정도면 족했다. 늘은 아니지만 한 번 쯤은 반가움으로도 자리가 빛 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죄다 지쳐서 늘어진 가운데도 회의를 멈추지 않는 지지모임은 대단할 뿐이다. 이 회의주의자들은 아무래도 병이지만 은근히 즐기지도 싶다. 웹진을 구상하며 쭈욱 나가다가 결국은 제자리, 그래도 꽤 많은 꺼리를 얻었다. 오는 길에 말들을 되짚다가 생각 속에서 헤맨다. ‘웹진’, ‘공동체’, ‘평가’, ‘활성화’ 등등을 징검다리로 건너다 오늘 자리에 못 오신 분들에게로 간다. 함께 모임을 꾸렸던 분들. ‘알아서 자율적으로 하는 거야’라고 내내 덮고 피해갔는데 그 분들과의 소통이 너무 부족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활성화’를 말하기 전에 했어야 할 일들이다. 어쩌면 좀 더 사적일 필요도 있다. 소통의 방식에 전제를 둔다는 것은 여러모로 입지를 줄인다. 근시다. (나는 사실 당신들한테 관심이 많다구.)
방을 치우고 싶어졌다. 말끔하게, 생각도 따라가렴. 안경을 안 닦아서 눈이 뿌연지 담배연기로 그런지 모르겠다. 둘 다일 거야. 아주아주 깊게 잠들 테다. 좋은 꿈꾸시길~
클로저(closer) – 잡
게으름도 길면 지치기 마련이다. ‘짜릿하게’라는 인사를 떠올려 본다.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었던 인사. 익숙한 것은 시들해지고 곧 잊히고 만다. 어느 날인가 ‘봄날’ 이라는 드라마를 보니 고현정이 이런 말을 하더라. “말을 하면 마음이 생기고, 마음이 생겨서 그 마음을 또 말하고, 그 마음을 또 말하다 보면 또 다른 마음이 생겨요” 하나를 줄곧 말해도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싶더라. 내게 말을 건 내야겠다. ‘열심히 살자’고 또 그 마음으로 ‘짜릿하게 살자’고, 그래서 채워진 마음으로 또 살자고. 살아서 생긴 마음을 살면서 갚자고.
헤아리는 게 멋쩍을 만큼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클로저(closer), 역시나 아무런 배경지식 누가 나오는지 감독이 누군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본다. 나탈리 포트만이 저기서부터 걸어오는데 이미 푹 빠지고 만다. 진실은 말해진 ‘어떤 것’이 아니다. 존재는 이름 불러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있는 것이다. 대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앨리스’던지 ‘제인’이던지 무슨 상관이람.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장미를 장미라 부르지 않아도 그 향기는 여전한 것”이라고 그러잖은가. ‘사랑이 심리학이 되는 순간 부패하기 마련이다’라는 김영민의 말은 일견 옳지만 마음을 너무 급하게 한 지점으로 모돈다. 나는 영화에서 보여 진 모두가 이해된다. 그건 내가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에게 마음을 품지 않아서 가능하다. 진실을 알지 못해도 사랑은 된다. 아니 진실은 다층적이다. 각자가 겪은 일련의 사건에 대한 진실은 차이가 넓고 좁혀지지 않는다. 당신이 옳고 그가 틀렸다가 아니라 맞닥뜨린 현실에서 자신의 마음 밖에서 상대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성인에게나 가능하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에포케가 가능하다면 사랑이 애시 당초 가능하겠는가. 노래만큼의 영화이다. 글쎄 제목(closer) 그대로의 영화인가 🙂
그나저나 줄리아 로버츠와 나의 공통점은
“It’s my birthday~” 시계를 선물 받았다! 앗싸~~
The blower’s daughter
And so it is
Just like you said it would be
Life goes easy on me
Most of the time
And so it is
The shorter story
No love, no glory
No hero in her sky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And so it is
Just like you said it should be
We’ll both forget the breeze
Most of the time
And so it is
The colder water
The blower’s daughter
The pupil in denial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Did I say that I loathe you?
Did I say that I want to
Leave it all behind?
I can’t take my mind off o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o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My mind, my mind
‘Til I find somebody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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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궁금한 점.
Movable Type과 reBlog를 함께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refeed는 제대로 설치하고 잘 굴러가는데, reBlog 플러그인은 대체 말을 듣지 않는군요. 설명대로 따라했거늘.
8명의 여인들 / 프랑스와 오종
메두사 되기
대개의 신화 기술과는 달리 ‘고르고’는 추악하고 무서운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메두사는 고르고 세 자매 중 막내의 이름이다. 고르고들은 여신들과 마찬가지로 불멸하고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러나 유독 메두사만은 죽을 운명이었다. 불멸의 종족에서 왜 하필 메두사만이 죽을 운명이었을까? 왜 신화 기술자들은 메두사를 죽이고자 했을까? ‘메두사’라는 어원을 찾아보면 ‘여성 지배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글쓰기는(신화를 기술하는 것은) 위대한 자들, ‘위대한 남자들’에게 국한 된 것이었다. 그 남자들에게 ‘여성’과 ‘지배자’는 껄끄러운 조합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메두사에게 ‘여성 지배자’의 의미를 거두고 죽을 운명을 부여하며 추악한 마녀로 탈바꿈시켰다.
메두사를 먼저 끄집어 낸 것은 8명의 여인에게서, 그들 각자에게서 메두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이는, 아버지라는 상징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그들 각자가 남성 바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영화를 본지 꽤 오래인지라 내게 남은 것은 앙상한 뼈대의 이야기뿐이지만 상상은 재현되기 마련이고 또한 즐겁다.
크리스마스 아침, 카트린느(뤼디빈 사니에 Ludivine Sagnier)는 등에 칼이 꽂힌 채 숨져 있는 아버지를 발견한다. 외부인의 침입 흔적은 없고 밤새 개도 짖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하려 하지만 전화선은 끊어져 있고 자동차는 시동이 안 걸리고 게다가 엄청난 폭설로 외할머니, 어머니, 이모, 두 명의 하녀, 언니 스종, 그리고 뒤늦게 들어온 고모까지 8명의 여인은 집 안에 고립되고 만다. 이들은 아버지를 죽인 자가 내부자의 소행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각자가 무죄를 증명하려 애쓴다. 단순히 시놉시스만을 보자면 폐쇄된 공간과 한정된 용의자 안에서 범인을 추리해내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연상하고 말겠지만 영화를 한 발짝만 떨어져 본다면 스릴러라는 장르는 영화에서 가벼운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결혼도 하기 전에 남자친구의 애를 가진 언니 스종(비에르지니 르도엔 Virginie Ledoyen), 엄마 게비(까트린 드뇌브 Catherine Deneuve)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아버지와 결혼을 하고, 형부를 사랑하는 노처녀 이모 오귀스틴(이자벨 위페르 Isabelle Huppert), 피에르트 고모(패니 아당뜨 Fanny Ardant)는 애인과의 여행비용으로 돈을 요구하고, 고모를 사랑하는 레즈비언 하녀 샤넬(삐어미네 리샤르 Firmine Richard), 하녀를 가장한 아버지의 정부 루이즈(엠마뉴엘 베아르 Emmanuelle Beart), 자신의 남편을 독살하고 유산을 가로챈 외할머니 마미(다니엘 다리우 Danielle Darrieux), 각자의 무죄를 증명하는데 있어서 이 8명 여인에게서 드러난 진실은 추악한 것이라기보다는 시선에 함몰되지 않는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8명의 여인이 아버지의 시선 밖에서 낱낱의 억눌렸던 욕망을 실어내는 각개가무는 시종일관 즐겁다. 이 각개가무는 재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영화서술에서 서술의 힘을 쥔 이들은 항상 남성이었다. 그러나 ‘8명의 여인들’에서 중간 중간 펼쳐지는 춤과 노래는 영화에서 여성이 드러나는 재현의 구조 즉, 관습적(남성적) 시선을 깨뜨리고 있다. 영화의 형식은 시선의 형식에 상응하기 마련이며 이 상응하는 시선은 다시 가부장적 지배구조에 상응하기 마련이다. 8명의 여인은 서술의 힘을 관객의 몫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8명의 여인 각자에게 주어짐으로써 관객 일반에게 제시되는 남성적 입장(시선)에서 탈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펼치는 노래와 춤은 있는 그대로 여성들의 욕망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지를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욕망하는 대상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인간다운 속성인지를 여성이 그 인간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밝혀지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실은 막내딸과 아버지의 자작극이었다. 아버지는 죽음을 위장해서 한집안에 같이 사는 여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들의 욕망을 속속들이 알아버린 아버지는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8명 여인들 모두가 아버지를 죽인 공범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버지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 영화 내내 즐겁기만 했던 여인들의 욕망이 아버지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아버지는 관객 일반과 마찬가지로 ‘욕망을 가지지 않은 여성은 자연스럽다’를 내재화한 인물이다.(관객 일반은 관습적 시선과 상응하는데 젠더로서의 남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적 시선이 내재화된 여성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 아버지는 다름 아닌 ‘여성의 종신성을 운명 안에 틀 지움으로써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남성들의 다른 이름이고 그 상징에 다름 아니다. 영화 내내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아버지는 현실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가부장제와 흡사하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여성들을 그들의 욕망을 억압하고 저울질하는.
8명의 여인은 그 모두가 메두사이다. 다른 이들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욕망을 드러내며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지배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재현의 과정에서 여성은 항시 주체보다는 객체로서, 주체성과 힘을 상실한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존재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8명의 여인들>은 변화 자체이다. 여성들이 타자로만 머물러야 했던 과거의 운명을 주체로 되돌리는 공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상징을 돌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아버지의 눈으로 여인들을 바라보기를 멈추게 하고 있다. 욕망이 재현되는 곳은 더는 아버지의 눈이 아니다. 욕망을 가진 여성은 비로소 자연스럽다!
명동성당 389일
지난 30일 해단식 이후 일주일을 더 지켜온 천막을 걷었다.
1년 하고 며칠, 천막 아래 썩고 묶은 것들만큼 모두가 착잡했고, 물로 씻어내고 흘려보낸다. 그들도 우리도 흘러갈 것이다. 시궁창이어도 고이지 않을 것이다.
할 말이 많다
명성 앞 호프 모두가 취하고 있다.
12월 7일
밑줄을 헤매던 날들
헌책방에서 만나는 ‘우연’이 차츰 쌓이면, 언제고 찾던 책이 눈앞에 있을 때의 떨림과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책이 주는 설렘으로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흥분된다’로 끝내기엔 결코 담아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오랜 시간 퇴적된 책 냄새, 그 빛바랜 종이에 눌린 시간이 한꺼번에 나를 들이친다. 그러면 몸이 훈훈해지는 게 어째 찬찬히 책을 살필 기운이 난다.
어느 때는 키보다 훌쩍 높아 벽이 되어버린 책들에서도, 구석 먼지에 홀대받던 곳에서도 주인을 기다리는 책은 꼭 있기 마련이다. 연이란 그치지 않고 바람이 불면 바람개비 돌듯 닿는가 보다. 조우하게 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이전 주인의 밑줄과 메모를 만나게 된다. 그런 메모와 밑줄이 헌책을 사기 꺼리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때론 그 책을 유일무이하게 하고 빛나게 한다.
퍽 오래전 헌책방에서 듬성듬성 마음을 잡는 책들을 쫓다가 고정희의 <이 시대의 아벨>을 어루만졌다. 책의 맨 앞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 한겨울
1도씩 기울어져 가는
어머니의 허리 노동을
나는 이 시집으로 빼앗았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오래 사십시오.
1984. 3. 25”
나는 시보다 이 메모에 먼저 밑줄을 그었다. 이것은 여느 책에 딸린 유명한 작가들의 덕지덕지 한 찬사보다 훨씬 공명이 크다.
한때는 금서목록을 주욱 적어 놓고 헌책방에서 찾아보는 재미를 가져보기도 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재미이고 책 사냥일 뿐이었다. 지금이야 어느 서점에서라도 구할 수 있다지만 <페다고지> 3년, <자본주의의 구조와 발전> 2년이란 말이 농처럼 돌았다. 소지하고 있다가 걸리면 구속되고, 검찰의 구형이 각각 3년, 2년이었다는데 까마득한 얘기이다.
그것들을 헌책방에서 본 날이면 책장을 천천히 넘겨가며 메모들을 들춰보곤 했다. 고백건대 항시 비장한 글로 가득했던 그 사회과학서적을 나는 읽어낸 게 거의 없었고, 조금 지나서는 아예 들추지 않았다. 그냥저냥 재미가 없었고, 누렇게 해바랜 책에 유달리 붉고 선명한 밑줄은 넘어오지 말라는 금 같았다.
어느 헌책방에서든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책들은 살아있다. 그 살아있음이 더 빛나게 될지 아니면 사장될지는 다음 주인의 몫일 테고, 책은 끊임없이 소용되어야 한다. 계속해서 닦아주고, 살피고, 손때가 묻어나야지, 책장을 메우기 위한 것으로만 남는다면 그 책장은 책의 무덤이 되고 만다. 책장은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책이 잠시 머물며 쉬는 곳쯤으로 남아야 한다.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면서도, 고른 책을 셈하면서도, 방 한구석에 책을 놓으면서 여기가 그들의 무덤이 아니길 바란다. 그 바람이 내 책 읽기를 독려하겠지만, 어느 순간 그것을 놓아버리면 까마득해지리란 것을 안다. 책을 닦고, 목차를 훑고, 서문을 읽고, 새로 꽂힐 자리를 어림짐작해본다. 이것이 이 책들이 빛을 발하는 시작이기를 기대한다. 내 책장에서 오래 쉬지 않을 것이다.
하이든 세레나데
밖에 나갈 채비를 하는데 휴대폰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뒀더라 끙끙거리며 뒤적이다 집 전화로 전화를 걸어본다. 웬 음악이 나오기에 잘못 걸었나 싶어서 끊었다. 다시 번호를 확인해 가면서 전화를 건다. 웬 음악은 여전히 나온다. 생각해보니 지난달엔가 컬러링을 이용하면 싸이월드 도토리를 준다기에 신청했던 서비스다. 한 달은 공짜 라더라.
하이든의 ‘세레나데’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대개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하겠지만 직접 듣는다면 ‘아 이 음악’ 하면서 아는 체할 것이다. 세레나데야말로 전화배경음악의 고전이 아니던가. 주로 “이 번호는 없는 번호이니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시고 ….” 할 때의 음악 말이다.
꽤 오래전에, 컬러링이 처음 도입됐을 무렵인가, 그때도 무료에 혹해서 신청한 적이 있었다. 물론 알아서 한 것은 아니고 TM을 통해서 신청하라는 권유를 받은 것이다. 신청 후 바로 너무나 신기해서 휴대폰을 옆에 두고 집 전화로 전화를 걸었더랬다. 엄청난 기대를 품고 다이얼을 누르는데, 잔잔하게 들려오는 음악……., 잠깐의 기대감은 잔잔함 속에서 와르르르 무너졌다. “뭐야 이거. 이건 없는 번호입니다 할 때의 배경음악 아냐” 혹은 “…다이얼이 늦었으니…..”
속은 기분에 휩싸여 당장 취소하겠다고 SK에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해지하겠다고 했더니 이용료를 내야 한단다. 아니 신청한 지 2분 됐는데 게다가 당신네가 무료라고 해서 한 건데 무슨 사용료냐며 침 퍽퍽 튀기며 말이 되냐고 따졌다. 그래도 상담원은 하루분의 사용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용료는 무슨 사용료냐며 꽤 큰 소리로(그 상담원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만은)“대체 하루 사용요금이 얼만데요?”라며 따졌다. 그 상담원, “고객님 하루 이용료는…” 말을 못 잇는다. 괜히 의기양양 더 큰 소리로 하루 사용료가 얼마냐고요? 라며 따진다. “고객님, 컬러링 하루 사용요금은…. 20원입니다”. 그랬더랬다.
그 하이든의 세레나데가 지금 내 휴대폰 컬러링이다. 없는 번호처럼 보이는 것도 나쁠 건 없다. 아직도 그게 뭐야? 라는 사람은 내게 전화를 해보렴. 너무 돌아가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