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벗고 잠을 청하다 휴대폰 소리에 눈이 뜬다. 손이 가기가 멀어 벨 소리를 듣다 나는 지치는데 대체 누구인지 끈질기다. 천장을 멍하니 보는데, 하얀 벽에 우련 한 손자국들이 듬성듬성 있다. 내 방 천장은 반은 하얀색 페인트로 칠했고 반은 실크 벽지이다. 그 무거운 벽지를 천장에 바를 때 고사리 같은 손들이 엉겨 붙었다. 풀 묻은 손자국이 남아서 ‘이거 닦아 야지요?’ 말했어도, 우리가 아니라면 저 자국들이라도 지금을 기억해야지 하고 내비 뒀었나 보다. 나이를 먹었고 떠밀리며 잊었다. 안경을 쓰고도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이 외려 흐릿한 나안이 되어서야 기억을 친다. 내 난시처럼 기억도 가물 한데 그래도 너희 얼굴이 있다. 잘 지내지들?
“웅기야 날이 여전히 춥다. 벌써 상병이네.
꼭꼭 숨은 은경아 졸업 축하한다.
주영인 생일이네 축하한다.
근미야 어서어서 리뉴얼 해야지? 나도 은혜 갚을 수 있어야 할 텐데.
윤경아 더 좋은 인연이 있을 거야. 힘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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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의 술자리였나. 결혼을 앞둔 선배가 말한다.
“정말 내 여자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겠어. ……….”
이미 결혼한 선배가 거든다.
“머더러 이해 할라싸냐, 그런갑다 하고 외워야지.”
대체 당신들을 이해할 수 없어, 나야말로 외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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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날 땐 초콜릿을 먹어요, 나는 초콜릿과자를 좋아해요, 나는 모더니즘 계열의 단편소설을 좋아해요, 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해요, 나는 사전 찾아보는 걸 좋아해요, 작은 꽃들을 좋아해요, 저녁 대신 군것질로 때우는 걸 좋아해요, 기승전결의 사실주의 소설을 싫어해요, ….”
‘체리 주빌레’를 좋아한다고 했었나, 인연을 믿는다고도 했었나?
저는 무엇이든 아니지만, 잘 외워요. 눈이 와요 할말이 생겨서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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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3
강남역 사거리에도
신촌 뒷골목에도
이문동 철길 옆에도
눈이 내린다.
눈이 닿는 곳 어디나
한 폭 그림이 된다.
9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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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틈으로 바람이 차다.
[작성자:] 부깽
Niemals Aufgeben!
내게 무엇이던지 저만큼 가치 있는 것이 있던가. 대가리 꼿꼿이 세우고 생각컨데 나는 너다. 이 삽화를 보는 내내 엉뚱하게도 모르스 앙리(Maurice Henry)의 데생이 오버랩 된다. 나는 자학의 시간이 길다. 개구리야 주먹을 더 굳세게 쥐렴, 황새야 세상은 늘 노랬잖니. 나는 힘껏 옭매던 밧줄을 놓을 테니 내 두 발은 시궁창이어도 좋아라.
<Never ever Give up>의 출처가 궁금해서 여기저기 뒤져봐도 그린 이에 대한 정보는 없다. 모리스 앙리의 데생은 <동키호테의 탈출/열화당> 중에서, <Niemals Aufgeben> 그림 출처는 아래 사이트.
http://www.stud.uni-hannover.de/user/68837/funpics.htm http://www.zabbal.com/sitemap/Homepagebilder/never.jpg
김훈 / 풍경과 상처
김훈은 무엇보다 풍경과 상처의 작가이다. 그의 마침표 끝에서는 어떤 풍경들이고 고스란히 살아난다. 무턱대고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내 과거의 편린들이 그의 결을 따라 한뜸 한뜸 기워 엮인다. 뒤돌아 보건대 덮었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풍경은 온전치 않다. 말들이, 단어가 움직이고 나는 내 기억으로 비틀거리며 선다. 면도날에 손을 베인 것처럼 금방 선명하게 핏빛이 그어진다. 그러나 기억들은 흘러넘치는 법이 없다. 피들이 덩이져 굳어지듯 내 기억들은 그렇게 풍경마다 하나의 상처를 안고 응고되어 있다. 풍경도 상처도 과거에만 있다. 꿈같다.
온전히 10년 전 풍경과 상처를 읽었다. 우리말이 이처럼 빼어나다는 느낌을 나는 그에게서, 그의 두 쪽짜리 서문에서 배웠다. 언제고 장석남의 시를 읽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빚지는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듯이 꼭 그랬다. 풍경과 상처를 해를 두고 책을 달리해서 읽는다. 나는 그의 초판 서문보다 재판 서문을 더 좋아한다. 낱말 하나가 들어가고 빠진 셈이지만 그 낱말 하나는 김훈의 글쓰기를 오롯이 버텨내고 있다. 그 모양새야말로 어떤 수사 없이 누구고 사는 모습이라. 초판의 서문에서 ‘김훈은 씀’이라고 끝맺는 것을 재판에서는 ‘김훈은 겨우 씀’이라고 고쳐 쓰고 있다. ‘자전거 여행’에까지 이어지는 ‘겨우’야 말로 김훈이 글을 쓰는 자세일 터다. 써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안의 것들을 글로써 밀어내는 것, 안에 오래도록 지녔던 상처를 ‘겨우’ 내 몸 밖으로 밀어내는 일이다. 쓰는 내내 몸도 따라 아플 것이다.
아무리, 그래, 세월동안, 아무리, 말들을 흩뜨리고 풍경을 지워도 상처는 아물지 않더라. 이제야 짐작건대 멀리서는 소멸도 풍경이다.
3월 20일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고귀한 자산을 던져버렸다. 국기와 국가가 잘 못 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개인이 거기에 반대할 권리 말이다. …….. 그리고 그와 함께 애국심이라는 기괴하고 웃기는 낱말에서 정말로 존중할 만한 모든 것도 버렸다.”
마크 트웨인의 전쟁을 위한 기도에 대한 몇 마디와 “3월20일 반전행동에 손잡고 가요”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괜스레 말을 늘리다 밥이 탔다. 내 밥.. ㅠㅠ 여하튼 반전평화를 외치던 양심들은 얼토당토않은 애국심에 묻혀 가려졌고 석유 확보와 무기 소비를 통해 자국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려는 부시의 광기는 여전하고 거기다 경제경제 나발불며 좋아라 따라가는 놈들이라니.
나야 아등거리며 할 수 있는 게 3월 20일 함께 가자고 말하는 게 다다. 아무도 3월 20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그 야만의 세력들에게 보여줘야지!!! 손에 손잡고 시청앞으로!!!
돌베게에서 출간된 마크 트웨인 전쟁을 위한 기도 중 36 – 85페이지를 옮긴다. 존 그로스의 삽화가 함께 들어 있는데 케테 콜비츠를 좋아한다면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지 싶다.
오,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help us to tear their soldiers to bloody shreds with our shells;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의 포탄으로 저들의 병사들을 갈기갈기 찢어 피 흘리게 하소서.
help us to cover their smiling fields with the pale forms of their patriot dead;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의 청명한 벌판을 저들 애국자들의 창백한 주검으로 뒤덮게 하소서.
help us to drown the thunder of the guns with the shrieks of their wounded, withing in pain;
우리를 도우시어 천둥 같은 총성을 저들의 부상병들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내지르는 비명 속에 잠기게 하소서.
help us to lay waste their humble homes with a hurricane of fire;
우리를 도우시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포화로 저들의 누추한 집들을 잿더미로 화하게 하소서.
help us to wring the hearts of their unoffending widows with unavailing grief;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의 죄 없는 과부들이 비통에 빠져 가슴 쥐어뜯게 하소서.
help us to turn them out roofless with their little children to wander unfriended the wastes of their desolated land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이 집을 잃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흙바람 이는 황폐한 땅을 의지가지없이 떠돌게 하소서.
in rags and hunger and thirst, sports of the sun flames of summer and the icy winds of winder,
누더기를 걸친 채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 여름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에 겨울에는 살을 에는 한풍에 노리개가 되어
broken in spirit, 영혼은 찢기고
worn with travail, 노고에 지친 몸으로 헤매게 하소서.
imploring Thee for the refuge of the grave and denied it
주님께 안식할 무덤을 간구하더라도 거절하시고
for our sakes who adore Thee, Lord, 주님을 경모하는 우리를 위하여
blast their hopes, 저들의 소망을 산산이 날려버리시고
blight their lives, 저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시고
protract their bitter pilgrimage, 저들의 비참한 순례가 끝나지 않게 하시고
make heavy their steps, 저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시고
water their way with their tears, 저들의 눈물로 저들의 길을 젖게 하시고
stain the white snow with the blood of their wounded feet!
저들의 상처투성이 발에서 흐르는 피로 흰 눈을 얼룩지게 하소서.
We ask it, in the spirit of love of Him Who is the Source of Love,
우리는 그것을 바라나이다. 사랑의 정신으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께.
and Who is ever-faithful refuge and friend of all that are sore beset
곤고한 처지에 놓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모든 이에게
and seek His aid with humble and contrite hearts.
항상 믿음직한 피난처요 친구이신 주님께.
Amen 아멘."
2월 달력을 넘기면서 끄트머리 글을 가져온다.
“용기를 내어서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 폴 발레리.
3월은 힘차게! 으쌰!
고기파티 등등
점점 요상한 기능만 하나씩 늘어가고 있습니다. 오른쪽 위에 9px | 10px | 11px 가 보이시죠? 바디부분의 폰트를 조절해 줍니다. 다른 곳은 그닥 불편할 것 같지 않아서 그대로 뒀고, 내용부분만 폰트 적용이 되게끔 했습니다. thegirliematters의 소스를 그대로 베꼈는데, 자바스크립트도 css와 마찬가지로 링크를 통해 불러 오고 있더군요. 전체적으로 소스가 말끔해 질 수 있겠지만, css도 헤매고 있는지라 천천히 봄이 오면 정리도 할 겸 시험해 볼까 합니다. 정리 혹은 리뉴얼에 대한 압박은 이 블로그가 익스플로러 전용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다른 창과 호환이 안 되고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특히 모질라에서는 절망적이지요. Links 맨 아래에 Random Blog를 달았습니다. 블로그코리아에 등록 된 곳들 중에 아무곳이나 가게 됩니다. 재밌겠죠? ;;;
다른 블로그를 볼 때마다, 역시 기능보다는 내용이야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까딱거립니다.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게으른지 깨닫곤 하죠. 얼마나 게으르냐면 깨닫기’만’ 합니다.
아시는 분들만 아시겠지만 어제의 고기파티는 성황리에 끝맺었고, 남은 고기는 목요일쯤해서 마저 해치울까 합니다. 회비는 현지, 근미 자매가 다 낸 관계로 목요일 날 오시는 분들은 양심만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남 몰래 후원해 주신 어머님께 감사를.
아침에 밑반찬을 몇 가지 준비해 주시면서 누구누구 오냐고 묻더군요,
“재홍이가 올 것 같아요“
“재홍이 여자친구도 같이 오니?”
“그렇죠 같이 오겠죠”
“그래, 니 여자친구도 오니?”
“………………………….(엄마 전 여자친구가 없어요…)…….”
기억
커피포트를 밖으로 내놨다. 방안에 커피 향이 잔잔한 게 며칠은 좋더니 놈팽내와 합쳐져 궁상스럽다. 그보다도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는 듯해서 줄여볼까 하는 심산으로 손이 덜 가는 곳으로 치웠다. 올 들어 비운 커피만 어제로 1200그램을 넘겼다. 약탕기도 아니고 계속 지글지글 끓는 포트도 고생스러웠을 게다. 내 속이 아픈 줄 모르다가 ‘아니 내가 입맛이 안돌다니’란 생각을 짚다보니 아무래도 원인이 커피였지 싶다.
관계란 언제나 일방향이다. 나는 말하고 너는 듣는다. 너는 말하고 나는 듣는다. 동시에 말할 순 있어도 동시에 들을 수는 없다. 내가 그 잠깐을 기다릴 줄 알았다면 혼자서 ‘동시에 들을 수 없는’ 적막을 예까지 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유도 공원을 걸으면서, 나는 내내 ‘기억’에 대한 생각을 한다. 오래 멀찍이 떨어진 것들은 미화되고 근래의 안 좋은 일들은 부쩍 드러나기 마련이다. 결국 요전의 일들을 먼데의 기억으로 위안받고 있는 셈이다. ‘선택적 기억’이라면 이왕 위안모드로 돌아가는 게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기억이란 게 꼭 향기 같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고 아프다. 나는 네가 곁에 있으면 그립지 않을 것이다. 부재야 말로 기억의 숙주이다.
그림을 그려야지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어렸을 때 내가 문득거리며 등을 톡톡치며 알은체한다. 나는 반갑고 오래 기억하고 싶다.
일어나라 열사여
오랜만에 북한산에 올랐습니다. 오랜만이라고 말하는 게 겸연쩍을 만큼 드문 산행이지만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에 새삼스레 감탄과 감사를 보냅니다. 백운대에서 바람은 가슴을 휑하니 뚫고 갑니다. 묵고 곯은 것들도 덕분에 얼마만큼 가셨습니다. 모든 게 관계없지만 그 관계없다는 말이 가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김진균 성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내내 투쟁하시던 때와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가 분신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명의 현대중공업 노동자가 산재치료 중 병원 난간에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기억하시죠? 작년에 6명의 노동열사를 보냈습니다. 34년 전 전태일 열사의 유서와 김주익 열사의 유서 박일수 열사의 유서가 변하지 않은 나라에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노동자가 아닙니까? 당신의 어머니는 노동자가 아닙니까? 당신의 아버지는 노동자가 아닙니까? 손잡고 기대면서 함께 가야할 사람들을 우리가 차별하고 있습니다. 겨우 나도 노동자인데 그 앞에 ‘비정규직’이 붙으면 사람이 아니게 되는 세상입니다. 노동자라는 이름에 누가 그 쓰디쓴 모욕과 굴레를 덧 씌우고 있습니까. 국익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우리는 침략전쟁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나와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전범국가의 국민이 됐고, 아무도 내가 어디에 섰는지 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체 언제까지 이 야만의 시대를 침묵해야 합니까. 나는 나와 관계없는 데도 못 견디겠습니다. 그것을 이유로 또 못 견디겠습니다. 나는 내가 약자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가 약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약자라는 것을 알지만 당신과 내가 함께 있는데도 약자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만든 경계가 아니라면 그 선을 애써 무시할게 아니라 이제는 허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홀로 걸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다른 고귀한 발들과 보조를 맞춰 함께 걸으면 우리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사빠띠스따의 절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지 맙시다. 제발 죽지 맙시다. 살아서, 갈기갈기 찢기고 짓씹혀도 그래도 살아서 싸웁시다.
진보넷에 실린 박일수 열사 유서입니다.
http://cast.jinbo.net/news/show.php?docnbr=29893 故 박일수씨가 남긴 유서 전문
어차피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신분에 한 점 부끄럽지 않다. 노동자 신분에 보람과 긍지,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이 사회에 또는 현대 좃지나 공장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이길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기득권 가진 놈들의 배를 불려 주기 위해 제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차별과 멸시, 박탈감, 착취에서 오는 분노.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현대 좃지나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패, 착취, 비리. 직영노동자들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대하는 행패와 멸시, 고위 관리직 이사부터 하위 관리직 팀장, 반장까지 안 썩은 곳이 없고, 상납이라는 추악한 고리에 향락 접대에 연결 안된 개새끼들이 없다. 윗물이 그러하다면 협력업체 총무, 경리까지 노동자 임금을 도둑질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현실 피해자는 하청노동자다. 상납되는 검은 돈,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피를 빨고 돈 잔치를 하고 있고, 향락접대비도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땀과 피로 술 퍼마시고 개지랄들 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좃지나 공장에서 관행처럼 뿌리 박혀있는 추접하고 더럽게 썩어있는 현대 좃지나 공장의 현실이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간 존엄성은 개만도 못한 처지로 땅에 떨어져 있고, 크게는 이 나라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우롱하고 기만하는 처사이다. 이렇게 썩고 곪아터진 현대 좃지나 공장 관리자 개새끼들부터 근원적으로 개혁이 되어야 한다. 2003년 12월 29일 오후 6시경, 현장 복귀 문제와 체불임금 문제로 000 000는 인턴기업사장 박진용과 논의하던 중 나에게 한 말이었다. ‘연말이 되어 윗사람 떡값문제로 바쁘다’고, 이런 더럽고 추악한 행태는 인턴기업 만의 문제가 아닌 현대 좃지나 공장 전체의 실태다. 대한민국 대기업 하는 곳 썩을 대로 썩어있는 현대 좃지나 공장을, 이 암울한 하청 비정규직 문제를 개선해 줄 곳은 아무 곳도 없다. 대한민국 노동법은 자본을 위한 법이고 하청 비정규직에게 생색만 내는 노동법이다. 현대어용노동조합은 그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조합이고, 노동자는 하나라는 원칙은 말장난일 뿐, 열악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다. 태어나면서 귀족노동자, 하청노동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어떻게 하다보니 직영노동자, 하청 비정규직노동자로 살뿐인데 직영노동자라 하여 하청 비정규직노동자를 기만하고 멸시할 자격은 없다. 이런 현대 개좃같은 풍토가 개선되어야 한다. 신성해야 될 일터가 부정, 부패, 비리, 착취, 멸시, 불신, 박탈감 이런들이 현대 좃지나 공장의 현실이다. 2003년 7월 22일 유인물을 통해 처우개선, 차별 경영을 개선해 달라 강력히 요구한 바 있으나 바른말하고 목소리 내는 자는 작업을 시키지 않고, 부당해고로 문제를 숨기려 하는 자본가와 관리자들 행패와 더럽고 추접한 작태를 당하면서 이 억울함과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이런 억울함을 노동부에 고발해 봐야 부당해고비 몇 푼 받으면 끝난다. 근원적인 문제개선은 접근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이 세상에 밝혀지고 대수술이 없는 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희망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손가락이나 빨아라 라는 차별경영을 비통한 마음으로 당하면서 또 한번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피눈물 나는 심정으로 울분을 달랬어야 한다. 이렇게 악질 차별경영을 하는 회장 및 고위관리자 개새끼들 대가리 두 조각 내어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인턴기업사장 박진용 집안 삼촌인지 사촌인지 현대 좃지나 공장 이사로 재직 중 얼마전 미포조선 이사로 옮긴 줄 알고 있다. 웃기는 것은 미포조선에다 업체를 하나 더 문을 연단다. 업체사장 2년만에 땅값 비싸다는 삼산동에 아파트를 사서 입주하고 친동생에게는 땅값 비싼 삼산동에 식당을 차려주고 고향에다 땅을 사고, 차를 바꾸고, 미포조선에다 업체를 차리려면 공탁금만 해도 얼만데 일반 사람 상식으로는 이해를 할 수 없다. 이런 악질 협력업체 사장은 이사회에서 매장되어야 한다. 인터기업 노동자인 후배 한사람. 외국으로 취업 나갈 기회가 있어 근로자 원천징수 사본이 필요해 세무서에 가서 확인을 해보니 인터기업 근로자로 등록이 안되어 있다 한다. 근무한지가 일년이 넘었는데도 상황으로 보아 세금탈세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현대 좃지나 공장 사내복지 시설을 하청비정규직 노동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식당, 샤워실, 화장실, 커피자판기다. 그 많은 복지시설은 직영노동자만 사용한다. 직영노동자 탈의실과 하청노동자 탈의실에서부터 소외감을 갖는다. 하청노동자는 콘테이너 박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한여름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그늘 찾아 헤맨다. 한 겨울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바람피할 곳을 찾아 헤맨다. 직영노동자는 시설 잘되어 있는 건물 내부에 휴식을 취한다. 이렇듯 직영노동자에 비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는 차별을 받는다. 직영노동조합 단체협약을 보면 백가지도 넘는 복지혜택, 문화의료혜택, 자녀교육혜택, 주거혜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는 정해진 시급, 일급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청비정규직 노동자 90%가 불법파견근로로 현장에 투입되다 보면 직영노동자에게 작업지시를 받는다. 작업하기 더럽고 어렵고 힘든 곳은 하청노동자에게 투입시킨다. 이토록 비인간적이고 불합리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현대 좃지나 공장 현실이다. 직영노동자 몇 백명 중에 한 두 사람은 인간적인 사고와 공동체 의식 인격적으로 노동자는 하나라는 생각, 측은지심 시각으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직영노동자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리고 하청 비정규직 현실이 변하는 데에는 도움이 안된다. 그리고 현대 좃지나 공장 외부 일반적인 사람들 하청비정규직 노동자가 가족들조차 이 나라 지도자들 법을 집행하는 고급공무원들 노동자 바람막이를 해줘야할 노동부 공무원들도 몰라서도 안하고 알아도 안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현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이 이렇다 하여 나도 그렇게 살수는 없다. 이 나라가 요만큼이나 민주화가 된 것은 세상이 쥐꼬리만큼 변하게 된 것은 이 사회 구조를 아파하고 정직한 노동의 대가가 안 주어지는 이 현실에 약자가 보호받아야 되는 법이 외면하는 현실에 한계에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약해지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모순된 현실을 개선하고자, 개혁하고자, 사랑하는 처자식 남겨두고 홀로 외롭게 세상을 고통스럽게 떠나버린 열사들이 있었기에 쥐꼬리만큼이나마 이 사회가 노동자의 환경이 변한 것이다. 나도 앞서간 열사들의 고뇌와 희생에 같은 심정이다. 나의 한 몸 불태워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이 착취당하는 구조가 개선되길 바란다. 악질 협력업체 사장 박진용 같은 사람이 이 사회에 발붙일 곳이 없어야 한다. 부디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진실된 노동의 대가가 보장되는 일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박일수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날아라 날아라 썬더보드호
보일러 사태(사태? 암 사태지)로 영 개운치도 않고, 만원 전철에서 사람들에 치여 짜증이 갑절이 되는데, 순간 저어기서부터 우러나오는 노래, ‘날아라 날아라 썬더보드호 비추어라 비추어라 천년여왕아~♬’ 집에 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검색을 한다. 역시! 그 세세한 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무한한 향수를 돌보는 이들이 있다. 소리바다에서 김국환 아저씨가 부른 천년여왕과 은하철도999를 다운 받는다. 하록 선장은 검색이 되질 않고 있어. 애꾸눈 선장 애꾸눈 선장♪♩ ~ 으아아 듣고 싶다!
일요일마다 아침을 허겁지겁 먹고 눈곱 떼고 TV앞에 자리를 틀어잡고 한주를 손꼽아 기다리다 본 만화, 우주해적 캡틴 하록, 천년여왕, 은하철도999 등등 마쓰모토 레이지가 준 내 유년의 선물들. 이젠 대강의 내용도 가물가물 하고 인물들의 이름이나 겨우 기억하는 정도지만, 그 어린 날의 주변들이 생각에 생각을 붙들고 온다. 손 트고 콧물 질질거리던 겨울, 털귀마개, 벙어리장갑, 썰매, 그게 전부인 것 같던 세계 속에서 만난 메텔과 철이 하록선장, 안드로이드들.
오랜 반과거들로, 얼토당토않게 온 기억들로 숨통이 트인다. 이렇게도 하루가 위안이 되는구나. : )
Galaxy Express 999
마쓰모토 레이지 작품들간의 관련성
멜랑콜리의 묘약
‘토요일이네‘라고 짧게 뱉는 말이 한 주의 긴장감을 일순 풀어버리는 탄성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 주 토요일, 좀 더 편히(여기서 얼마나 더 편해질 수 있을까 만은)쉬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무럭무럭 피어오는데, 마음과는 다르게 보일러 공사를 구경 참견 세면 먼지를 들이마시며 얼렁뚱땅 보낸 견적이 43만원 이었다. 주말 비용치고는 꽤, 꽤? 좇나 많이 나갔지만 앞으로 아껴가며 잘 살아야지 위안하며 넘겼다. 겨우 넘겼단 말이다.
사흘 후 아랫집에서, 물이 또 새요,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옹송크려지더만 습관처럼 몇 날이 아프다. 오늘 드디어 토요일, 끔찍한 토요일, 다른 시공사를 찾았다. 견적 80만원(합계 123만원) “이것도 갈아야 하고 저것도 갈아야 하고…….” 이렇게 갈다간 가을에 풍년 나겠어 얼쑤. 300D를 포기하고 ‘그래 내 주제에 무슨 dslr이야’하며 D70이 나와도 ‘에잇 역시나 그림의 떡이야’ 하며 ‘내 주제를 알자 알아야해’ 하며 그렇게 이불 뒤집어쓰고 하며하며하며 꾹꾹 참았는데, 보일러만 멀쩡했어도 다 살 수 있었어. 설레고 행복에 겨워 ‘토요일이닷’ 탄성을 지르며 아무리 추워도 출사를 계획하고 ‘이까짓 세상쯤이야 다 찍어 버려’, 그렇게 깔봤을 텐데.
공사는 하루 종일 걸릴 것이래. 그래서 오늘 할 수가 없고 내일(내일? 일요일? 일요일은 빨간 날이잖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야 할 것 같데, 아랫집에 물이 흥건하니 오늘은 우선 보일러를 잠그라네. 온수는 더더군다나 써서는 안 되고, 오늘의 서울 날씨, 온도 최고-1℃, 최저 -7℃, 마음은 절대온도 0K, 모든 사고가 정지된 것 같아. 진공 상태가 된 머릿속을 수직 운동하는 단어를 멈출 수가 없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우울해 ……. 머리를 뚫어도 좋으니 꺼져버리란 말이야. 훌쩍.
레비나스
1. 레비나스에서 비극이 불가능한 이유.
필립 네모가 "어떻게 사유가 시작되는가?" 하고 질문했을 때 레비나스는 "이별이나 폭력적 장면,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간의 단조로움에 대한 의식, 이와 같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처나 망설임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답한다. 이것은 고통, 비극이 바로 사유의 시작임을, 특히 레비나스적 사유의 시작임을 암시해 준다. 레비나스 고통의 철학에서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점은 변신론의 종말 이후에도 신과 도덕성의 이념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생각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 점에서 칸트와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1) 변신론의 정당성을 문제 삼으면서 (2) 오직 도덕적 악만을 수용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 한계 안에서 악의 문제를 다루며 (3) 윤리적 맥락에서 고통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4) 그러면서도 여전히 신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칸트보다 더 철저하게, 더 드러내 놓고 변신론의 종말을 말한다. 레비나스는 변신론의 종말은 어떤 논리로 논박되었거나 또는 인간 이성의 법정에서 비합리적으로 판정받았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특히 아우슈비츠와 같은 20세기 사건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변신론이 더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한다고 보고 있다.
변신론의 몰락으로 야기된 것은 (적어도 서양 전통 안에서는) 인간의 고통에 이제 어떠한 의미, 어떠한 유용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물음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고통이란 ‘결국에는’ 좀 더 나은 선을 이룩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이론이 변신론이었고 이것이 무너지자 이제는 고통의 의미, 고통의 유용성 자체가 또다시 문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그러나 이렇게 못박는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고, 쓸모없는 경험이다. 고통, 비극 속에는 어떠한 내재적 합목적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성을 통해서 고통, 비극을 해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2. 레비나스에서 윤리적 사실주의의 한계
레비나스의 핵심적인 윤리관 중의 하나는 "타인을 위한 나의 의로운 고통"은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나의’ 고통 또는 ‘너의’ 고통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볼 때 사람들이 괴로워한 것은 한 개인이나 집단이 경험한 무의미한 고통이었다. 고통은 언제나 ‘나의’ 고통 또는 ‘우리의’ 고통이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전통을 뒤집어 놓는다. 그의 관심은 내가 받는 고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받는 고통에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비나스의 관심은 타인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고통의 물음에 관련해서 관심의 축을 ‘나’ 또는 ‘우리’로부터 ‘타인’으로 회전시킨 점에서 레비나스의 독창성이 있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이러한 관심 축의 전환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인이 받는 고통 중에서, 예컨대 아내나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가운데, 자기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각자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주관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하더라도 의미 발견의 과정은 개인의 삶에 대한 이해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것은 어떤 경우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차피 고통 자체가 아무리 집단적으로 당하는 고통이라 하더라도, 고통 자체로서는 언제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감성적’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