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의 문제- 앙드레아 스미스

번역 – 한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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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의 문제- 앙드레아 스미스

자신들이 누리는 젠더/인종/성/계급/등등을 둘러싼 특권에 대해 성찰하는 방식의 운동, 정치적 프로젝트에 대해서.
“나는 누구고, 어떤어떤 특권을 누려왔다”는 고백은 그 발화의 순간, (이러한 특권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고백자를 용서하거나 면죄해줄수 있는 청자로서 일시적인 권력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어떤 효과를 갖는 것 같지만, 사실 이러한 의식ritual 은 그것이 저항하고자했던 그 지배적인 구조를 재-공고화하는데 기여한다. 이 의식 속에서 백인/남성/이성애자/etc.는, 자기성찰이 가능한 주체로 재성립되는 한편, 인종화/젠더화된 주체들은 그러한 자기성찰을 위한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변혁을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는 반드시 우리 자신의 근본적 재구성을 동반해야한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의 변혁은 사회/정치적 변혁속에서 (그와 함께)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특권의 해체는 개인의 고백 혹은 스스로를 새로운 위치에 두고 생각해보려는 노력에 의해 가능한게 아니라 그러한 특권을 가능케하는 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집합적인 구조의 생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특권을 해체하고 싶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구조를 바꾸고 그럼으로써 지금의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고백하는 주체]
데니사 다 실바는 서구의 주체가 자기성찰과 분석의 능력을 갖고 있는 자기규정적이며 보편적인 주체라고 분석한다. 그(서구적 주체)는 자신을 자신이 아닌 “타자”와 비교한다. “타자”는 물론 인종화된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실바는 인종화/식민화된 사람들 (타자들)이 당면한 문제가 그들이 “비인간화”되어 왔다는 점이라고 믿는 사고를 비판한다. 근본적인 문제, 그러나 그동안 주목받지 못해온 문제는 “인간” 그 자체가 인종적 프로젝트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보편성에 호소하는 프로젝트이며, 특정한 “타자” 위에서, 그것에 반해서만 가능한 프로젝트이다.
결론적으로 두가지 문제가 남는다. 첫째. 젠더화/식민화된 타자로 위치지워진 자들은 그들이 자기규정적 주체가 되는 순간 (다시 말해, 완전한 “인간”이 됨으로써) 해방이 뒤따를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염원하는 인간성은 여전히 또다른 젠더화/식민화된 타자의 억압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 망각된다. 해방을 위한 투쟁이 또다른 억압의 산물이 된다는 것.
이런 분석은, “해방”이란 전혀 다른 자아들, 즉 자기를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과의 급진적 관계성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목표는 반인종적/반식민적 어휘의 습득이 아니라 자신을 다르게 이해하는 것. 즉, 자신이란 존재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들을 통해서만 구성된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둘째. 해방을 “인간화”로 간주할 때 해방은 인간성을 부여받기 위해 가치를 증명하는 문제가 된다. 만약 그들이 우리를 더 잘 안다면, 그들은 우리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간의 지위를 부여할거야. 그 결과, 반인종적 운동과 학문적 프로젝트들은 종종 민족지적 다문화주의라는 덫에 갇히고 만다.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민족지적 대상으로 위치짓고, 백인주체가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평가하게 하는 것이다.
레이 쵸는 이러한 민족지적 덫이라는 위치에서 네이티브에게 가능한 유일한 수사학적 자리는 “저항하는 소수집단”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계속 불만을 얘기하면 체제가 무엇인가 던져줄것이라는 인정/승인의 정치학 속에서 구축된 자세posture. 쵸의 작업 위에서, 이 글은 현제의 경제체제 안에서 형성된 또하나의 자세에 대해, 어떻게 그러한 자세가 생산되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성찰적인 입식자/백인 주체이다. 이 자기성찰적 주체는 다양한 반-인종적 행사에 등장하는데, 그들(특권적 주체)은 자신이 어떻게 식민지적/젠더화된 주체에 노출됨으로서 식민주의의 복잡함과/또는 백인의 패권에 대해 배울수 있었는지 설명한다.

여기서 네이티브는 자기성찰이라는 과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듣는 고백의 가치를 평가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고백하는 주체들은 종종 심하게 긴장한다. 내가 나의 특권을 다 말했나? 적절한 방식으로 고백하고 있나? 혹시 청중중에 누가 실수를 발견하거나 내가 정말로 반인종적 주체가 되었는지 질문하면 어떻하지? 그럴경우, 그 주체는 더 많은 자아성찰을 하게 되고 이후 더 많은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특권의 고백은 결국 (반인종주의/반식민주의를 주장하지만) 입식자/백인 주체의 구성을 돕는 전략이 되고 만다.
자기성찰은 백인/입식자적인 주체의 구성을 돕는다. 물론, 이 글도 자기성찰이라는 논리를 피해갈 수 없다. 또한, 설령 반인종차별 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네이티브를 문제적으로 재현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 사람들이 특별히 결함이 있다거나 그들의 학문이 가치가 없다는 걸 지시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반인종주의 워크샵에서 특권을 가진 “고백하는” 주체들은, 자신들이 정착한 땅의 식민주의 혹은 백인들의 패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들의 연대는 대단히 중요하다. 더 나아가, 유색여성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이 지적했듯이, “억압받는” 사람들과 “억압하는 자”들 사이에는 사실 뚜렷한 구별이 없다. 개인들은 다양한 맥락 안에서 고백자로서의 혹은 고백을 심판하는 자로서의 다양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니 이 분석의 요점은 인종화/식민화된 사람들이 애시당초 보여지고 이해되는 보다 큰 다이나믹을 설명하는 것이다.
선주민들은, 그들이 충분히 이해되거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억압받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 네이티브를 “알고자”하는 이 욕망 자체가 선주민들의 잠재적인 힘을 파악하고 길들여 정복국가에 복속하고자하는 프로젝트의 일부이다. 이로써 네이티브의 투쟁은 단순히 그들의 요구를 알리는 것, 그래서 그들의 주장이 정복국가에 인식되도록 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일단 그들의 요구가 파악되면, 그들은 보다 쉽게 관리되고, 포함되며, 훈육된다. 그러므로 탈식민주의 프로젝트는 오드라 심슨이 “민족지적 거부”라고 부른 것, 알려지는것, 확실히 알만해 지는 것에 대한 거부를 요청한다. 탈식민주의의 정치는 입식 식민주의를 넘어서는, 그러므로 알수없는 이론, 지식, 사상, 분석의 증식을 요청한다.

[자기성찰을 넘어서]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우리의 프로젝트는 자기의 수양, 혹은 심지어 집단적인 자기수양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언어로 표현할수 없는 새로운 세계들과 미래상을 창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단순한 반-억압의 공식은 없다. 우리는 끊임없는 시도와 실패, 급진적인 실험의 와중에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특권을 해체할 수 있는 몇가지 새로운 방식의 가능성들을 제안하고 싶다. 이는 앞으로 가기 위해 “고치는” 과정이 아니라, “너머”에 대한 우리의 집합적 상상력에 몇가지 덧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탈식민주의적 프로젝트들은 우리의 특권에 대해 보다 잘 “알기”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것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반인종/반식민주의적 자아-성찰이라는 프로젝트와 대비될 것이다.
이들은 남미에서 특히 많이 보이는 “권력을 구성함으로서 권력을 탈취하는” 모델에 기반한다. 이러한 모델들은 선주민 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땅없는 농민 운동, 공장운동, 그리고 다른 여러 투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모델들은 또한 미국과 다른 여러곳의 다양한 사회정의조직들에 의해 활용되었다. 이러한 모델들을 뒷받침하는 원칙은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싶은 세상을 실제로 생산함으로서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 그룹들은 위계, 지배, 통제 대신, 수평성, 상호부조, 관계맺기라는 원칙에 기반한 대안적 통치 시스템을 개발하고자 한다. 이러한 세계를 생산하는 그 처음부터 주체들은 변한다. 이 운동들은 남미의 혁명적 선두 모델로 조직되었다가 “기계적 레닌주의”모델이라고 비판받게된 권위적/위계적 모델에 대한 대응으로 발전되었다. 이 권위적 모델들은 자신들이 싸우고 대체하려한 시스템과 같은 시스템을 재생산 했을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당파적이었다. 이에, 모두가 참여할수 있는, 자신의 일상생활을 기반으로한 모델을 구성하는 운동들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다른 통치의 방식을 구성하는 이러한 운동이 지향하는 정치는 미국내의 많은 활동가 그룹에 만연한 “안전한 공간”이라는 개념에 도전한다. 안전한 공간이라는 개념은 특권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는, 우리가 일단 우리의 젠더/인종/계급적인 특권을 고백하면, 그럼으로서 타자들이 이 특권으로부터 안좋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안전지대를 만들어낼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성애적 가부장주의, 백인우월주의, 식민주의, 또는 자본주의를 해체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고백된 특권들이 “안전한 공간”에서 실재로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이 이러한 공간들 속에서 그/녀의 특권에 대한 죄책감을 가질때, 그/녀는 그 공간을 “안전하지 않은” 곳을 만들었다고 비난받게 된다. 이런 수사적인 전략은 오직 특정한 특권적 주체만이 이 공간을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만든다고 가정한다. 마치 다른 모두는 이성애자 가부장주의, 백인우월주의, 식민주의, 자본주의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듯이. 우리의 초점은 세계 전체를 안전하지 않게 만드는 커다란 구조들로부터 관계적인 행동을 이동한다. 덧붙여 “안전하지 않음”에 대한 비판은 인종주의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유색인들에게도 부과된다, 단지 그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그 공간을 안전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결국 안전한 공간의 문제점은 안전한 공간이 가능할거라는 가정 그 자체이다.

대조적으로, 식민지, 가부장제, 백인패권주의로부터의 망명지로서의 안전한 공간이라는 생각 대신, 루시 길모어는 안전한 공간이 실재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실재로 불러오는 연습의 공간이라고 제안한다. “권력을 구성하는” 모델은 이 제안을 따라 단지 자신들이 살고 싶은 세계를 지금 여기에서 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 예를 들자면, “유색인 여성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졌을때 우리는 그 공간이 안전하다는 가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사실 그곳은 위험한 공간이다. 우리가 깨달은 것은 우리는 서로의 연대를 가정할 수 없다는 것, 연대는 실제로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억압적이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는 가정 대신 실제로 도움이 되었던 한가지 전략은 우리가 백인우월주의/식민주의/이성애적 가부장제/등의 구조에 연루되어 있음을 가정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의 정치과 실천에 있어 특별히 문제적인 이슈들과 관련해 스스로를 교육할수 있는 공간들을 구성함으로서 이러한 가정들을 우리의 조직에 구조화했다. 장애, 반흑인 인종주의, 정착민식민주의, 시오니즘과 반아랍 인종주의, 트랜스 포비아 그리고 또다른 문제들이 이러한 이슈에 포함되었다.그러나, 이러한 공간에서 우리는, 억압을 둘러싼 우리 개개인의 복잡성을 무시하지 않는 한편, 집합적으로 우리의 정치와 실천을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개발했다. 다시말해 이 공간은 고백자와 고백을 듣는자의 다이나믹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우리 모두가 이 억압적 구조들에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을 해체하기 위해 함께 일해야한다고 가정했다. 결과적으로, 내 경험에 의하면 이러한 공간은 개인적, 사회적 변화에 통합되는 우리 스스로의 능력을 촉진한다. 아무도 그가 대중을 향해 고백해야하는 특권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힐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결론]
특권의 정치는 우리가 얼마나 억압적 구조에 의해 구성되어 왔음을 알리는데 중요한 기여를 해왔다. 그러나, 특권을 고백하는 의식이 진화함에따라 그것은 우리의 초점을 세계를 바꾸기 위한 사회운동에서 개인적인 자기수양으로 옮겨버렸다. 게다가 그것은 백인 패권주의자/식민주의자들의 주체 개념, 즉 자기-성찰에 의해 형성되는 주체, 타자들 위에서 타자들에 반하여 구성되는 자아로서의 주체 개념에 기대고 있다. 개인과 사회의 변혁은 연결되어있다는 활동/학계의 중요한 통찰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한편, 대안적 프로젝트들은 특권보다는 특권을 생산하는 구조에 주목하려 해왔다. 이러한 모델이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해방을 위한 운동적/지적인 우리의 프로젝트들이 계속해서 변해야 한다는 것을 특권의 정치의 계보학은 보여주었다. 우리의 상상이 백인 패권주의, 식민주의, 등등에 의해 제한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생각도 “완벽”할수는 없다. 또한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과거에 해온 것의 완전한 폐기 위에서 이루어질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권을 넘어서는 것 뿐 아니라, 특권을 주장하는 자아의 개념을 넘어설때, 우리는 우리가 지금 상상할수 없는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우리 스스로를 개방한다.

원문
The-Problem-with-Privilege-ASmith

https://andrea366.wordpress.com/2013/08/14/the-problem-with-privilege-by-andrea-smith/

기억의 자리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기타노 다케시의 <돌스>에서 귤을 미끼로 쓴 낚싯줄에서 고기가 입질을 하는 장면이 있다. 사랑은 아무도 돌보지 않던 우연으로,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이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사랑의 사실적인 핵심은 우발적이다. 엄청난 우연이 그와 그의 연인을 묶지 않았던가? 여기에서부터 거꾸로 가야 한다. 그러자면 그가 선택한 기억에서, 선택해서 남겨둔 기억에서 ‘추억’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끄집어야 한다.

추억에도 속도라는 것이 있다며 그는 아주 드물게 그 속도라는 것을 감지한다고 했다. 이응준의 소설집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에서 처음 “추억의 속도”라는 말을 만났다. ‘보았다’나 ‘읽었다’가 아니라, 만났다. 그 말에서 ‘사랑’ 역시도 낯설고 큰 우연에 둘려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했고, 그 시작이 종국에는 추억이라는 소실점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소실점 뒤는 보이지 않고 떠오르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애써 떨친 추억의 속도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나희덕의 시 ‘기억의 자리’에서였다.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 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기억의 자리 – 나희덕

나는 퍽 오랫동안 등을 돌리고 걸었다. 점점 덮쳐오는 추억보다 빨리 걸어야 한다며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더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지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걸어서 추억이 마음과 기억의 자리에서 충분히 멀어졌다며 안도했을 때, 무심코 앞을 보았다. 그 앞에 내 발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돌고 한참을 돌아 그 자리에서 다시 섰다. 발자국마다 하나의 기억들이 움푹 패 있었다. 조금씩 깊이가 다른 걸로 봐서 기억이라는 것도 무게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말의 무게였다. 기억의 자리마다 말들이 스미어 사과나무가 싹을 피우듯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내가 지불한 말들이 발자국 언저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길은 반복되어도 다시 낯선 풍경으로 펼쳐졌다. 그 길에서 ‘사랑’이, 무수한 ‘우연’이 ‘또’ 시작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삶은 왜 내가 던진 돌멩이가 아니라 그것이 일으킨 물무늬로서 오는 것이며 한줄기 빛이 아니라 그 그림자로 오는 것일까’, 거스름돈 같은 것이 사랑이다. 무언가를 계속 지불하고 ‘몇개의 동전이 주머니에서 쩔렁’거리며 ‘아프게 나를 깨우’는 소리만 들려오는 것. 그리고 추억이 속도를 더할 때 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아프게 귓가를 찌른다. ‘삶을 받은 것은 무언가 지불했기 때문’이라는데, 사랑은 그렇게 항상 결핍된 존재로만 오나 보다. 그 추억 어디쯤에 말들은 이제 무성해져 사과 한 알은 열렸을까?

사랑, 우아한 부패

러브콜을 받는다는 건 자신의 가치에 대한 부름이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게 되는 것. 그가 백화점의 일류 고객이어서 바겐세일 전에 이득을 챙기는 것이든, ‘꼭 당신이어야 해요. 당신이 아니면 안 돼요.’라는 간곡함으로 어떤 소임을 수행하는 것이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에게 무엇인가를 헌정하는 실제적인, 내적인 온갖 몸짓’ 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헌사(dédicace)’라고 말한다. ‘러브콜’은 ‘사랑’의 자리를 교묘하게 ‘필요’로 대체하면서 헌사의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필요하니깐 부르는 것이다. 사랑을(love) 부르짖으면서(call)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오랜 속성을 배제한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당신은 당신이 길들인 장미를 영원히 책임져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러브콜’은 ‘영원’을 ‘순간’으로 모면하면서 더는 책임 따위가 사랑의 속성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다. ‘구애(求愛-love call)가 끝나는 순간 애(愛)는 따라서 소실’된다.
그러나 구애 이후 또 다른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즉 ‘사랑에 빠진’ 이에게 “시작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끝낼 수는 없는 것, 바로 그것이 구애”라는 김영민의 말은 매혹적이다. 그 스스로 ‘사랑이 심리학이 되는 순간 부패하기 마련’이라지만, 흔해빠져 널리고 널린 사랑. 하다못해 길에서조차 넘쳐 반라의 전단이 발길에 차이며, ‘사랑’이 더는 담론의 영역에서 머물지 못하는 때에 사랑의 심리학은 얼마나 우아한 부패인가.

무릇 연인은 늘,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결여에 시달리는 법이다. 그 시달리는 방식은 은밀하고 집요하다. 수동과 능동의 정서가 변덕스럽게 교차하면서 양철판을 긁듯이 간지럽힌다.

<사랑, 그 환상의 물매>에서 김영민은 반복의 구조를 유지하는 사랑의 메커니즘을 ‘물매(기울기)’라는 용어를 빌어 설명한다. 사랑의 출발은 시소를 타는 것처럼 타자와 내가 비슷한 무게중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가능하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서 꿈쩍도 안 한다면 시작은 됐지만 이어질 수 없다. 나보다 우위에 있으며 내게서 떨어진 타자로부터 나는 떨어지지 못하기 마련이다. 균형 속에서 동시에 매 순간 놀이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도 함께 작용한다. 이러한 물매의 반복으로 ‘자의성’은 잊히고 기억은 타자가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거나 ‘낮은 위치’에 있다는 비대칭으로, 이는 다시 상처로 자연스럽게 고착된다. 얼핏 기억, 상처, 결여, 비대칭 등등 사랑을 둘러싼 단어들은 치명적인 것들의 집합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환상을 통해 적절하게 ‘현실의 수위와 지평’을 조절한다.

그가 자서에서 말하듯 “사랑은 그 무엇보다 그 열정의 기울기에 따른 사소한 차이들의 나르시시즘이다. 현실의 물매가 환상을 낳고 그 환상의 물매는 사랑을 번성케 하는 법. 현실과 환상이 겹치는 만큼 당신은 어제처럼 내일도 사랑할 것”이다. 그치지 않고 삐거덕거리는 시소음, 그것이야말로 ‘끝낼 수 없는’ 구애이다.

밑줄을 긋다

독학자-배수아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고는 이 책 어디에 밑줄을 그었을까 들춰본다. 짚이는 대로 빼어 든 게 배수아의 <독학자>이다. 독학자라니, 이왕이면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정도가 손에 잡혔으면 줄거리만 가지고도 충분한 이바구가 됐을 걸.
한 때는 책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밑줄 긋기를 꺼렸다. 그냥저냥 낙서로 여겼을 뿐이며 어떤 밑줄은 넘어오지 말라는 선으로 다가와 그쯤에서 책을 덥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헌책방을 다니면서 점점 낯모르는 이들의 밑줄을 쫓는 재미를 알았고, 조금 더 지나서는 자를 대지 않고도 찍찍 밑줄을 만드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됐다.

<독학자>를 보자면 몽상은 관념에 뿌리를 내리고 숙주처럼 기생한다.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지만 한순간에 선명하게 나뉜다. ‘독학자’는 독한자이다. 흡사 박일문의 <살아남의 자의 슬픔>에 나오는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이처럼 여겨진다. 그 끝에 다다라서는 대체 몽상가이거나 관념론자가 되는 수 말고 다른 게 있을까. 물론 덕후(オタク)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책을 통해서 많은 죽음을 읽었다. 그러나 어느 책에서도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과 같은 태도는 읽지 못했다.’ 이것이 독학자의 비운이다.
소설의 ‘내’가 ‘그려낸’ 마흔을 위한 ‘팬터지’, 그 지난한 밤과 주말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나는 어쩌다가 심심함이 지나쳐 죽을 것 같은 날에만 책을 본다. 게다가 대체로 혼자 잘 노는 까닭에 그닥 심심해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책은 일 년에 채 열 권을 읽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흔 살까지는 어떤 영감을 받더라도, 독후감 이상의 것은’ 쓸 수 없다. ‘쓰지 않겠다’와 ‘쓸 수 없다’ 이것이 소설의 ‘나’와 나의 가장 큰 차이이다. 이쯤에서 다행인 건 <독학자>에서 밑줄을 발견한 것이다. 단 한 곳이지만. ‘인생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스스로를 표현할 것’이라는 P교수의 근사한 말도 아니고, ‘나’의 노동과 삶, 혹은 마흔에 대한 멋들어진 독백도 아니다. 지울 수조차 없게 초록 색연필로 찍하고 그어진 밑줄.

“범죄자는 자신의 행위를 분석하고 이해하고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 사고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반복해서 다시 세우고 그리고 그것을 치밀하게 기록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반복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편을 택한다. 범죄자는 그 행위, 범죄로부터 오직 도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도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망각이며, 망각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은 반복을 통한 무의식화이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을 만치 그에게 이 밑줄을 들이밀고 싶다. 이런 걸 달리 습관이라고 하자. 범죄자의 습관이건, 페미니스트의 습관이건, 설사 ‘고도’를 기다리는 습관이라 해도 무의식적인 반복은 귀와 눈을 멀게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 도피는 조금 지나서는 자기를 망각하는데 이른다. 결국엔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치는 무슨 말과 행동을 했든 간에 그리 뻔뻔해질 수 있었던 걸까.

아드리(adli)를 떠나는 사람들

참을 수 없는 것, 이라고 써놓고 내내 딴짓이다. 내게 참을 수 없는 것은 뭐가 있을까. 재미없는 책? 오토바이 소음? 버스에서 누군가의 통화로 낯모르는 이의 한 생애를 줄줄 꾀게 되는 상황? 마감을 초 앞에 둔 글쓰기조차도 곧 원고지 몇 장을 채우고는 덮을 테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이 정도는 이전 직장의 그들보다는 훨씬 참을 만하다.

오래 담아둔 이야기가 있다. 하룻밤을 푹 자도 잊히지 않고, 한 달이 지나도, 반년이 훌쩍 넘어도 가시지 않는 것. 이쯤 되면 참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그것은 현실에서 만난 오멜라스다. 어슐러 k. 르귄의「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오멜라스’는 살렘(오리건)-Salem(Oregon)을 거꾸로 읽은 것이다. 그 오멜라스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우리가 아드리(adli)를 떠난 것처럼 더는 참을 수 없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어슐러 k. 르귄의 소설은 건조하지만 메말라 있지 않다. 스릴이 넘치는 것도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것도 아니지만,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 ‘아’하고 감탄해 버리는 그런 소설들이다. 당신에게도 참을 수 없는 오멜라스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모르는 척하며 여전히 오멜라스에서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이면을 알기 전에는 퍽 괜찮다고 생각해 온 곳. 내게는 이전에 일하던 아드리(adli)라는 곳이 똑 그랬다.

오멜라스는 얼마나 멋진 이상향인가? 성직자 없이도, 군인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곳. 진실을 보기 전까지 누구든 부러워할 만한 곳이다. 오멜라스의 가장 외진 곳 지하에는 한 아이가 버려진 채로 고통받고 있다. 아이가 비참해지면 질수록 오멜라스의 겉보기는 더 화려해진다.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 그 모든 것은 아이의 처절함과 정반대에 선다. 진실은 오멜라스의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고 알게 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직접 겪고도 ‘설마, 그럴 리가’라며 애써 덮고, 어떤 이들은 그런 것쯤은 ‘사소하다’며 계속 오멜라스를 누린다. 혹은 떠나는 이들에게 ‘대체 당신들이 생각하는 오멜라스는 뭔데?’라는 비난을 던진다.

“…….고통스럽다면 반복하라! 그러나 절망을 찬양하는 행위는 기쁨을 비난하는 행위이며, 폭력을 용인하는 행위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더는 할 말이 없다. 더는 행복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으며 즐거움을 축복할 수도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몇몇은 오멜라스를 떠난다. 우리가 아드리(adli)를 떠나듯 하루나 이틀 정도 침묵에 잠겨 있다가 떠나기도 하고, 여자이든 남자이든 상관없이 떠난다. 넷이 함께 떠나기도 한다. 그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아는 듯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그리고 아드리(adli)를 떠나는 사람들은.

무수한 편재

김승희는 『왼손을 위한 협주곡』 자서에서 ‘죽은 사람은 하나의 不在가 아니라 무수한 遍在’라고 말한다. 사진에 대해 얘기하면서 죽음을 꺼내는 게 뜬금없어도 이 말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사진’이다. 죽음 혹은 사라진 것들, 기억에서 망각된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고통과 찌름으로 연속된 사물들이다.
우리의 마음을 떠난 것을 기억하는 것은 사물이다. 사물은 차츰 기억을 떠올리고 그 안에 투영된 마음까지도 형상화하곤 한다. 그것은 롤랑 바르트가 프루스트를 빌어 말하는 ‘반과거’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매혹의 시제들. 사진은 숙주가 되어 사랑의 정경을, 처음의 황홀했던 순간을 뒤늦게 만들어낸다. 그러나 진실은 <토스카>의 아리아(E Lucevan Le Stelle)처럼 잿빛이다. “별은 빛나고 있건만” ‘그러나 그 행복은 결코 그대로는 돌아오지 않는다'(『사랑의 단상』).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행복, ‘실존적으로 결코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것을 기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사진의 특징이다. 롤랑 바르트는 『밝은방』에서 이것을 현상학적으로 풀어낸다. 『밝은방』은 샤르트르의 『상상적인 것』에 경의를 표하는 오마주로 시작한다. 그것의 부제는 ‘상상력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이고 롤랑 바르트는 현상학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사진을 찍은 이의 입장을 철저하게 배제하며 사진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에포케가 그의 눈을 통해 얼렁뚱땅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나폴레옹의 막냇동생 제롬의 사진을 보고서, “나는 황제를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는 놀라움을 마음껏 표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사진의 미덕이다. 그냥 관람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굳이 바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스투디움(studium)-나는 좋아한다’으로, 사진을 보는 것으로 충분히 즐거움을 가지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푼크툼(punctum)-나는 사랑한다’에 현혹된다면 사진은 이제부터 부재하던 것이 편재되는 매개이다. 그 기억들. 내 정신을 헤집던 것들. 다시 움트는 상처로, 온통 푸른 멍으로 몸은 또다시 옹송크려질 것이다. 슬픈 영화를 볼 게 아니라 옛 앨범을 뒤적이면 된다는 말이다.

바르트의 시대는 갔고, 누구나 하나쯤 들고 다니는 카메라, 거기에 관련된 책이라면 실은 『밝은방』 같은 게 아니라, ‘포토샵 보정’에 같은 게 훨씬 유익할 것이다. 얼마 전 친구가 그러더라. “뽀샵이야말로 백익무해다.”라고. 사진첩을 정리하며 ‘어, 어, 이거 뭐지’하며 보고 또 봐도 기억이 안 난다면 역시 『밝은방』따위는 던져버리고 포토샵 관련 책을 보는 게 현명하다.

황금 노트북 / 도리스 레싱

『황금 노트북』은 안나 울프(Anna Wulf)에 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안나가 쓰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주인공이자 작가이면서 동시에 서술자의 역할을 하는 안나 울프의 의식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안나의 의식은 ‘검정 노트북’, ‘빨간 노트북’, ‘노란 노트북’, ‘파란 노트북’ 네 권의 노트북과 내부의 ‘황금 노트북’ 그리고 ‘자유로운 여자들’간의 시공간을 오가며 전개된다.
처음 네 권의 노트북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안나의 여러 국면을 반영하고 있다. 검정 노트북은 젊은 날 작가로서 안나 울프의 성공을 비판적으로 보며, 백인 인종주의와 흑인 원주민의 갈등, 작가로서 안나와 한 개인이자 여성인 안나 사이의 갈등을 드러낸다. 검정 노트북이 끝날 때 안나는 이상주의적 열정으로 사회주의 이념과 정치활동에 참여하던 자신의 젊은 날에 수치심에 찬 냉소를 보낸다.

“이건 향수로 가득 차있다. 단어마다 향수가 서려 있다. 쓸 때는 객관적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무엇에 대한 향수란 거지? 알 수 없다. 그것들 가운데 무엇이든 다시 경험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을 뿐이다. 그때의 ‘안나’는 적, 아니면 너무나 잘 알아서 보고 싶지 않은 옛 친구와 같은데.”

공산당원으로서 정치적 경험을 기록한 빨간 노트북은 정치 참여에 대한 좌절과 실패를, 노란 노트북은 안나와 마이클의 연애와 결혼을 토대로 남녀관계의 갈등과 낭만적 사랑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제3의 그림자’라는 소설로 그려낸다.
파란 노트북은 안나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소설로 허구화 하는 것이 현실도피라 여긴 안나가 ‘일기’를 통해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토미와 몰리가 다투는 곳에서 벗어나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즉시 그 장면을 단편소설로 바꾸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 -모든 것을 허구로 변형시키는 것- 은 일종의 도피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왜 나는 결코 단순히 일어나는 일만을 기록하지 않는 걸까? 왜 일기를 쓰지 않는 거지? 내가 모든 것을 허구로 변화시키는 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감추려는 일종의 수단임이 명백하다. (…) 이제부터는 일기를 쓸 테다.”

안나는 일기 속에서 오랫동안 자신이 주변에 의도적으로 방관해 왔거나 혹은 기억에서 억제해 왔던 경험의 조각들과 대면하기 시작한다.
네 권의 노트북들은 전부 사라지고 내부의 황금 노트북이 등장한다. 이 노트북은 파편화된 안나들 간에 내재하고 있던 긴장들을 해결하는 위치에 자리하면서 네 권의 노트북을 한 권으로 통합하고 있다.
또 다른 내부 소설로써 전체 소설을 감싸는 ‘자유로운 여성’에서 안나는 객관적인 서술자로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전개한다. 현재를 사는 안나는 삶의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과거의 이상적인 안나와는 달리 더는 사람의 ‘유일한’ 진실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안나는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직시하고 내부와 주변의 혼돈을 포용하며 이야기를 쓴다.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하며 기대하는 역할 간의 갈등, 예술가로서 안나와 개인으로서 안나의 갈등, 이성과 감정의 괴리들로부터 안나가 획득하는 비전은 ‘인간의 의식과 이성으로 사회 이념과 신화, 가치체계가 분류되고 이름 붙여지고 테두리가 둘리기 이전의 상태’이다.
“지금 세계를 돌아보면 어디나 우리가 바라보는 구름처럼 변하지 않거나 해체되지 않는 생활 방식은 없다.”라는 도리스 레싱의 말은 안나의 비전을 이어간다. 여성과 남성 등의 성별 구분으로 대변되는 ‘모든 이분법적 원리를 벗어나,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공존하는 삶의 실체를 체험’하는 것이다.

새터황금노트북2

도리스 레싱의 자전적 소설로 일컬어지는 『황금 노트북』은 1962년 출간된 후부터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스트 선언’으로 여겨졌다.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의 평가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도리스 레싱은 1973년 판 『황금 노트북』 서문에서 “이 소설은 여성해방을 위한 트럼펫이 아니다.”라며 이러한 논의를 일축한다.

“『황금 노트북』이 수많은 여성적 감정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 나는 이 책이 페미니즘 운동 이후 창조된 것처럼 보이는 여성의 태도들이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쓰고 있다. (……) 이 책의 핵심, 그것의 구조, 그 속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이것저것으로 분리시키고 구분 지어서는 안 된다.”

『황금 노트북』은 1950년대 여성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레싱 역시 여성 권리를 명확하게 옹호하고 있다는 평이 지배적인데도, 서문을 들며 ‘작가는 페미니즘과 연계를 거부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리스 레싱은 당대 여성운동의 움직임과 그 과정 그리고 성과를 주시하고 있었고, 이 소설이 사회에 시사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서문을 통해 반대한 ‘분리’와 ‘구분’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페미니즘 진영의 큰 축이었던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경계로 해석될 수 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이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이익을 얻고 있으므로, 남성도 적으로 간주하며 여성만의 자율적인 여성운동이 필요하다고 봤다. 따라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찬미하며 어느 정도 분리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칫 여/남 구분에 따른 계층적이고 이중적인 사고방식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도리스 레싱은 『황금 노트북』이 여/남 간의 투쟁으로만 읽히는 것에 반대하며, 급진적 페미니즘이 국지적이라며 무조건 지지하기를 거부한다. 『황금 노트북』이 형식이나 주제에서 어느 하나의 의미로 고정할 수 없으며, 그러한 이유로 자신의 작품이 결코 ‘페미니스트 선언서’의 위치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소설에서 남녀의 문제뿐만 아니라 계급 간의 차별이나 인종차별 등을 아우르며 여성문제를 ‘분리된 여성의 문제’로 한정시키지 않고, ‘모든 억압받는 집단의 해방’이란 차원까지 확대한다.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가 『경계 없는 페미니즘』에서 ‘다차원적이면서 동시에 편협함을 들어내는 경계들 간의 긴장에 주목하여, 우리 일상생활의 경계들을 통과하며, 경계들과 더불어 그리고 경계들을 극복하는 해방의 잠재력을 지닌 페미니즘’을 말할 때, 도리스 레싱이야말로 ‘경계 없는’ 페미니즘에 가장 잘 들어맞는 작가 중 하나일 것이다.

아홉 생명 / 어슐러 르 귄

LOS ANGELES - DEC 15: Ursula Le Guin at home in Portland, Origon, California December 15 2005. (Photo by Dan Tuffs/Getty Images)  *** Local Caption *** Ursula Le Guin
LOS ANGELES – DEC 15: Ursula Le Guin at home in Portland, Origon, California December 15 2005. (Photo by Dan Tuffs/Getty Images)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단편 ‘겨울의 왕’은 『어둠의 왼손』의 시발점이 되는 작품이다. 어슐러 르귄은 『어둠의 왼손』에서 게센인-양성인간을 시종일관 남성형(he)으로 씀으로써 많은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 어슐러 르귄은 『바람의 열두 방향』에서 ‘겨울의 왕’을 개정하고, he로 표기됐던 양성인간-게센인을 칭하는 보통명사를 모두 she로 바꾼다. he가 she로 변하면서 어떤 아이의 아버지는 she가 되는 식으로, 여/남이라는 이분은 뿌리째 뒤흔들린다.

어슐러 르귄은 『어둠의 왼손』 서문에서 SF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 소설가들의 임무는 상상력이 현 세계에 갇히지 않도록 미래를 재현하고, 이를 통해 ‘이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메타포를 제시하는 것이다. 어슐러 르귄이 “모든 허구는 은유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 세계에 대한 은유이다. 그가 ‘겐리 아이’의 입을 빌려 말하듯 “진실은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어둠의 왼손』의 큰 줄기는 우주연합 ‘에큐멘’에서 파견된 ‘겐리 아이’와 게센 행성의 ‘에스트라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게센인과 마찬가지로 에스트라벤 역시 남성(he) 이며 또한 여성(she)이고, 또는 어느 쪽도 아니다. 게센인들은 한 달 중 대부분 시간을 성적으로 중성 상태에 있다가 단 며칠만 ‘케머’라는 왕성한 성적 발정기를 겪는다. 케머 초기의 상태에 있는 두 게센인은 하나는 여성으로 다른 하나는 남성이 되어 성 관계를 갖고, 각자 중성으로 되돌아온다.
다음 달에는 남성, 여성의 역할이 바뀌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각 게센인은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게센 행성에서 고정화된 성행위는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에큐멘의 사절인 겐리 아이는 게센 행성에선 외계인일 따름이다. 지구인인 그는 항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케머’ 상태에 있는 성도착자이며, 게센인이 볼 때는 오직 하나의 성으로 고정된 불완전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인 겐리 아이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을 여/남으로 구분하는 고정관념을 버리기가 어려웠고, 때문에 게센인의 본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테두리에 그들을 끼워 맞추는 실수를 하곤 한다.
제1차 에큐멘 조사원 보고서는 겐리 아이 같은 사절단을 위해 충고를 남겨 놓는다.

“여러분이 게센인을 만난다면 남자와 여자가 있는 양성사회에서 하듯 행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같은 성 또는 반대 성 사이의 양식화 된 즉 남녀 간의 상호작용을 기대하고 그들에게 남자 또는 여자의 역할에 상응하는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적•성적 상호작용이 보여 주는 그러한 양상은 이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을 남자와 여자로 보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상상력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기란 힘든 일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를 봤을 때, 우리가 던지는 최초의 질문은 무엇인가?”

게센 행성은 태어난 아이를 두고 ‘남자야? 여자야?’ 같은 질문이 아예 성립될 수 없는 사회이다. 어슐러 르귄은 인간의 성별화 변용을 통해 사회구조와 개개인들이 그들의 많은 부분을 성별 구분을 통한 분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다. 그것은 소설이 발표될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하지만, 더불어 이러한 문제의식은 소설이 발표된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에큐멘 조사단원의 보고는 계속된다.

“행성 겨울에 오게 될 선발대원이 아주 침착하거나 나이 든 사람이 아닐 때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 쉬우므로 특히 주의해야 한다. 남자는 으레 그의 남성다움을 과시하고 싶어 하고 여자는 그의 여성다움이 존중되기를 바란다. 그것도 간접적으로 우아하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겨울 행성에서 그러한 것은 통하지 않는다. 각자는 오직 하나의 인간이라는 존재로서만 존중되고 판단될 뿐이다. 그것은 사실 소름끼치는 경험이다.”

어슐러 르귄은 겐리 아이와 에스트라벤를 통해서 상대방을 성에 상관없이 한 인간인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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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열두 방향』 -아홉 생명
「아홉 생명」은 인간 복제를 다룬다. ‘마틴’과 ‘퓨’는 ‘라이브라’ 행성 실험 기지에 파견되어 있다. 그 둘의 임무를 지원하고자 ‘10클론’이라는 한 사람의 창자 세포로부터 만들어진 10명의 복제인간이 기지를 방문한다. 남자 다섯과 여자 다섯으로 구성된 복제 인간은 동일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때론 그들 모두가 한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퓨’가 10클론 중 한 쌍의 남녀가 섹스하는 것을 보고 근친상간인지 자위인지 모르겠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각자가 개별적 인간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머리와 10개의 몸을 가진 인간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클론의 특성으로 그들은 주어진 작업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해내지만, 결국 사고로 아홉의 클론은 죽고 ‘카프’만이 남게 된다. 살아남은 카프는 생애 처음으로 ‘다중 자아’를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서서히 자기 자신, 즉 인간에 대해 성찰을 하게 된다.

「아홉 생명」 1968년 「플레이보이」에 처음 실렸는데, 어슐러 르귄이 보낸 원본 원고에서 ‘사소한’ 부분이 바뀌어 출간되었다. 필명 또한 ‘어슐러 K. 르귄’이 아니라 ‘U. K. 르귄’으로 표기됐다. 어슐러 르귄은 이에 대해 “편집자나 출판업자가 자신을 ‘여류 문필가’로 취급하며 성적 편견을 보였던 생애 최초이자 유일한 경우였다”라고 말한다. 비록 「플레이보이」를 통해 SF가 대중적으로 크게 전파되는 계기가 됐지만 그들의 수준은 소설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플레이보이」가 바꿨다는 ‘사소한’ 부분은 ‘마틴’과 ‘퓨’ 두 남성에 관한 부분이다. 어슐러 르귄은 이들의 관계를 동성애로 나타내지만, 플레이보이는 이를 흡사 우정으로 보이게끔 하고 있다. 살아남은 카프가 퓨에게 던진 “마틴을 사랑하나요?”라는 질문을 「플레이보이」는 “마틴을 좋아하나요?”라고 바꾸어 놓았고, 퓨의 “그래, 사랑해”라는 대답을 삭제했다.

어술러 르귄은 퓨의 “… 우린 서로 외로웠어. 어둠 속에서 손을 내미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겠지?”라는 말에서 동성애를 ‘인간’ 사이의 자연스러운 성애로 묘사한다.

어슐러 르귄의 SF는 과학적 엄밀성을 넘어, 곳곳에서 드러나는 페미니즘과 동성애, 아나키즘의 요소를 통해 독자에게 ‘상상하라’고 “진실이란 상상하기 나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상상이야말로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 왔던 세계에 균열을 가하고, 그 틈으로부터 새로운 사고와 직관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학계에 존재하는 비가시성

레나토 로살도의 <문화와 진리> 서문은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로 시작한다.

 

예컨대 선생님이라는 권위를 가진 어떤 사람이 <이것이 바로 세계다>라고 묘사를 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 순간 심리적인 불균형을 겪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때와 같다. 

-애드리언 리치 『학계에 존재하는 비가시성』

 

도서관에서 에이드리언 리치 <Blood, Bread, and Poetry>를 빌려서 읽는 김에 겸사 번역해 봤다.

 

학계에서의 보이지 않음(Invisibility in Academe)

북미 사회에서 백인 지배 아래의 레즈비언 역사는 1656년 코네티컷 뉴헤이븐에서 레즈비언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에서 시작된다. 300년 후인 1950년대에도 레즈비언들은 거리에서 구타당하거나 부모의 강요로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정신 수술을 강제당했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1980년대 중반, 여성 해방 운동과 게이 해방 운동의 투쟁과 비전에도 불구하고 레즈비언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공격받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여자 대학 인근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서도 지난해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 레즈비언들은 여전히 행동 교정과 의학적 처벌을 강요당하고, 가족으로부터 추방당하며, 인종·종교 공동체로부터 거부당한다. 직장을 유지하거나 자녀 양육권을 얻고, 집을 빌리고, 공적인 자리에서 대표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성애자인 척해야 한다.

 

이 모든 상황에 비하면, ‘보이지 않음’은 감내할 만한 작은 대가처럼 보일 수 있다(‘개인 생활은 비공개로 하라’거나 ‘그 단어만은 쓰지 마라’는 요구처럼). 그러나 보이지 않음은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이며, 레즈비언들만이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 이름을 붙이고 사회적 현실을 구성할 권력을 가진 이들이 당신을 보지도 듣지도 않기로 선택할 때—당신이 피부가 검거나, 나이가 많거나, 장애가 있거나, 여성이거나, 그들과 다른 억양이나 방언을 쓰는 사람일 때—예를 들어 교사의 권위로 세상을 설명하면서 그 설명 안에 당신을 포함하지 않을 때, 당신은 마치 거울을 봤는데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것 같은 정신적 불균형을 느낀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으며, 당신과 같은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이는 거울을 이용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이 공허함, 이 비존재 상태에 저항하고 일어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영혼의 힘이 필요하다—개인의 힘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며, 당신의 경험이 다른 이들의 경험만큼이나 현실적이고 규범적이며, 역사학자 블랑쉬 쿡의 말처럼 ‘도덕적이고 평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신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은 억압자의 일을 대신해, 스스로의 벽장을 짓는 것은 아니다. 나는 19세기 여성들—모든 여성들—이 공개 모임에서 발언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그들의 침묵에 의존했다. 하지만 몇몇 여성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침묵을 거부하고 목소리를 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10년 동안 공개적이고 가시적인 레즈비언으로 살아왔다. 나는 스스로 레즈비언임을 밝혀왔고, 다른 이들의 출판물에서도 레즈비언으로 명시되어 왔다. 나는 레즈비언-페미니스트 운동에서 활동해 왔다. 여기 클레어몬트에서 나는 많은 따뜻함과 환대를 받았지만, 레즈비언으로서는 종종 보이지 않는 존재로 느껴졌다. 내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은 어떤 이들에게는 위협이 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환영받았다.  그러나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은 많은 이들이 알기를 꺼렸다. 이 경험은 내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보이지 않음은 단순히 ‘개인 생활은 비공개로 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이는 당신을 파편화하고, 사랑과 노동, 감정과 사상을 통합하여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내적 힘을 방해하려는 시도다.

 

나는 이 공동체에만 국한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학 프로그램을 포함한 많은 곳에서 이러한 파편화가 일어나고 있다. 대화와 논의의 기본은 여전히 이성애 중심이고, 레즈비언의 경험과 사상은 독서 목록의 일부나 단일 수업 시간으로만 ‘포함’될 뿐이다.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유색인종 여성들의 경험과 사상도 별도의 섹션으로 밀려나거나, 뒤늦게 생각난 듯 추가되는 반면, 중심 담론은 여전히 한결같이 백인 중심이며, 주로 중산층적 사고방식과 우선순위를 반영하고 있다. 두 번째 장벽의 이름은 인종차별이고, 첫 번째는 이성애주의(heterosexism)다. 흑인 정치학자 글로리아 I. 조셉(Gloria I. Joseph)은 ‘제3세계 여성과 페미니즘’ 강연에서, 호모포비아(homophobia)라는 용어가 통제할 수 없는 정신적 공황을 암시하기 때문에 부정확하다고 지적했다. 이성애주의(heterosexism)가 더 적합한 용어이며, 인종주의, 성차별, 계급주의와 유사한 뿌리 깊은 편견—정치적 세뇌—을 더 정확히 나타낸다고 제안했다. 이는 반드시 인식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재교육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남성 중심의 성별화된 사회에서 자란 어떤 여성도, 여성을 감정적·에로틱한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온 다양한 여성들의 존재, 실재, 그리고 현실을 모른 채로는, 이성애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인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혼란스러운 고정관념과 금기 속에서 20대에 접어드는 젊은 여성은 자신의 감정, 선택 가능성, 남성 또는 여성과의 관계를 제대로 성찰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이 무지와 불안은 레즈비언과 이성애자로 정체화된 여성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침묵, 이 전체 인구의 부재, 이 보이지 않음은 모든 여성의 사회적 권한을 약화시킨다. 레즈비언 학생들만이 자신들의 역사와 존재를 인정하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고, 현재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정확히 이해하며, 사회적 관계의 미래를 상상하려는 모든 여성이 함께 요구해야 한다.

 

여기 모인 우리 레즈비언들은 느끼고 있다. 우리를 단편적인 모습이 아닌 온전한 존재로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우리를 알려고 하지 않고 도망치며 침묵을 강요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우리가 다른 주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포함해, 온갖 우회적이고 예의 바른 척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침묵시키려 한다. 이 공동체에는 레즈비언뿐만 아니라 이성애주의의 지적·도덕적 빈곤을 인식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 회의가 끝난 후에도 논의가 지속되길 바라며, 우리가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 집단적 이해를 더욱 공고히 해나가길 바란다.

 

스크립스 칼리지 컨퍼런스에서의 발언,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 1984

 

소돔 120일의 구라

책의 내용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그 주변의 이야기를 양념으로 얹는다면 더 흥미진진해지기도 하다. 얼마 전 누군가 사드의 『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érités du vice 쥘리에트 이야기, 또는 악덕의 번영』을 빌려 달라고 해서 오만 책장을 다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Justine ou Les malheurs de la vertu 쥐스틴느, 또는 미덕의 불행』을 잘못 생각해서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인지 어쩐지 도통 모르겠다. 여하튼 찾아볼 만큼 찾아봤고 없다는 결론을 냈다. 사드의 번역서는 미덕의 불운이 번역된 적이 있고(『미덕의 불운』과 『쥐스틴느 또는 미덕의 불행』은 다른 책이다.) 과연 사드의 작품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성처녀의 욕망』이 ‘사드의 욕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외에 한 챕터를 빼먹었던 『안방철학』과 그 완역본인 『규방철학』, 그리고 워낙 유명해서 읽지 않고서도 이바구 까는 『소돔120일』 등이 있다. (『신부님의 금지된 장난』도 있다.)

소돔 120일을 한 호흡에 다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입에 침을 잔뜩 바르고 “우와 대단해요”라고 말해줄 것이다. 나는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가 차라리 읽기 수월했다. 책도 겨우겨우 읽어 냈을 뿐더러, 몇 년 전 파졸리니 회고전에서는 영화를 보다가 푸욱 자고 말았다. 여하튼 소돔 120일에 대한 메타 텍스트는 넘치고 넘치니 그걸로 욕구를 채우시고 단지 무늬에 대한 얘기를 할 생각이다.


소돔 120일

새터에서 번역 초판이 출간된 게 어언 16년 전이고 바로 판금 됐다. 후에 고도출판사에서 새롭게 나온 게 2000년이다. 이쯤에서 내가 번역자나 출판사를 씹는다 한들 판매에 영향을 줄 것도 아니요 망해버린 출판사를 욕 먹이는 일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으로 끼적인다. 이 우스개의 핵심은 출간 당시 동아일보 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동아일보 말고 한겨레에서도 똑같이 다뤘던 기억이 있다. 살펴보면 기자가 사실 확인을 안 하고 쓴 것이니 기사 자체가 소설일 수도 있다.

[동아일보 문화]-[새책] “내이름을 책에서 빼주오” `소돔 120일` 번역자 통사정“내가 번역자임을 알리지 말라”.

‘사디즘(Sadism)’의 어원이 된 사드 후작(1740∼1814)의 대표작 [소돔 120일]이 최근 재출간됐다. 한가지 이상한 점은 책 어디에서도 번역자 이름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일본 번역물을 마구잡이로 중역한 해적판일까.

고도 출판사 이춘화 대표는 ‘천부당 만부당’이라며 펄쩍 뛴다. “프랑스 고전총서를 모본으로 전문번역가가 1년 넘게 공들여 번역한 정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번역자의 신상에 대해서는 “유명대 불문과 박사과정을 마쳤다”는 말외에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이름이나 신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당사자의 뜻이 워낙 강력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담당 편집자는 “부모가 이 책을 번역했다는 것을 자식이 몰랐으면 한다고 통사정했다”고 귀뜸했다.

번역가조차 몸을 사릴 정도니 [소돔 120일]이 우리사회에서 아직도 ‘뜨거운 감자’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92년 새터 출판사에서 ‘용감하게’ 번역서를 냈을 때도 청소년보호단체 등 시민단체의 강력한 항의를 받아 초판 이상을 찍지 못했다.

하지만 사드의 작품에 대한 문학계의 시각은 ‘도착적인 에로티즘’ 이상이다. 이 책은 ‘이성 우월주의가 횡행하던 18세기에 서양의 합리주의를 전복시킨 저항문학’으로 평가받아왔다.

조르쥬 바타이유의 명저인 ‘에로티즘’ 같은 저서는 이 소설의 철학 버전과도 같다. 새터 출판사 서필봉 대표는 “지금도 문학 전공자들이 책을 살 수 없느냐, 복사라도 할 수 없겠냐는 문의 전화가 일주일에 3∼4통씩 올 정도”라고 말한다.

고도 출판사는 전공자를 겨냥해 책을 펴냈지만 내심 걱정하는 눈치다. ‘안전판’으로 표지에는 포르노물에나 등장하는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문구를 넣고 비닐랩으로 밀봉하는 성의를 보였다.

혹시 언론의 오해를 받을까봐 보도자료 만드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모 출판사에 편집자를 보내 홍보물 문구까지 감수(?) 받았을 정도.

이 대표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서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도 별 문제를 삼지 않을 것으로 본다”면서도 “행여나 과도한 여론의 관심을 받을까봐 걱정이다”고 속내를 털어놨다.(문화 윤정훈기자) 2000년 09월 01일

인간들의 구라는 뻔뻔하기도 하지. 10년 전 책을 토씨 몇 개 바꿔서 낸 게 다면서. 번역뿐만 아니라 역자의 앞머리도 똑같다. 고도 출판사와 새터 출판사의 앞 장 번역 비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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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의 번역자는 황수원. 심효림 옮김으로 돼 있고(심효림은 『사드 신화와 반신화』를 번역하기도 했다.) 고도의 번역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정말로 새로운 번역자인데 그 새로운 번역자가 아이들 보기 낯깎여서가 아니라, 이전 번역을 그대로 베낀 게 낯깎여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설마? ㅋ 어찌 됐든 이 정도면 사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