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자리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기타노 다케시의 <돌스>에서 귤을 미끼로 쓴 낚싯줄에서 고기가 입질을 하는 장면이 있다. 사랑은 아무도 돌보지 않던 우연으로,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이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사랑의 사실적인 핵심은 우발적이다. 엄청난 우연이 그와 그의 연인을 묶지 않았던가? 여기에서부터 거꾸로 가야 한다. 그러자면 그가 선택한 기억에서, 선택해서 남겨둔 기억에서 ‘추억’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끄집어야 한다.

추억에도 속도라는 것이 있다며 그는 아주 드물게 그 속도라는 것을 감지한다고 했다. 이응준의 소설집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에서 처음 “추억의 속도”라는 말을 만났다. ‘보았다’나 ‘읽었다’가 아니라, 만났다. 그 말에서 ‘사랑’ 역시도 낯설고 큰 우연에 둘려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했고, 그 시작이 종국에는 추억이라는 소실점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소실점 뒤는 보이지 않고 떠오르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애써 떨친 추억의 속도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나희덕의 시 ‘기억의 자리’에서였다.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 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기억의 자리 – 나희덕

나는 퍽 오랫동안 등을 돌리고 걸었다. 점점 덮쳐오는 추억보다 빨리 걸어야 한다며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더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지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걸어서 추억이 마음과 기억의 자리에서 충분히 멀어졌다며 안도했을 때, 무심코 앞을 보았다. 그 앞에 내 발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돌고 한참을 돌아 그 자리에서 다시 섰다. 발자국마다 하나의 기억들이 움푹 패 있었다. 조금씩 깊이가 다른 걸로 봐서 기억이라는 것도 무게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말의 무게였다. 기억의 자리마다 말들이 스미어 사과나무가 싹을 피우듯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내가 지불한 말들이 발자국 언저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길은 반복되어도 다시 낯선 풍경으로 펼쳐졌다. 그 길에서 ‘사랑’이, 무수한 ‘우연’이 ‘또’ 시작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삶은 왜 내가 던진 돌멩이가 아니라 그것이 일으킨 물무늬로서 오는 것이며 한줄기 빛이 아니라 그 그림자로 오는 것일까’, 거스름돈 같은 것이 사랑이다. 무언가를 계속 지불하고 ‘몇개의 동전이 주머니에서 쩔렁’거리며 ‘아프게 나를 깨우’는 소리만 들려오는 것. 그리고 추억이 속도를 더할 때 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아프게 귓가를 찌른다. ‘삶을 받은 것은 무언가 지불했기 때문’이라는데, 사랑은 그렇게 항상 결핍된 존재로만 오나 보다. 그 추억 어디쯤에 말들은 이제 무성해져 사과 한 알은 열렸을까?

사랑, 우아한 부패

러브콜을 받는다는 건 자신의 가치에 대한 부름이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게 되는 것. 그가 백화점의 일류 고객이어서 바겐세일 전에 이득을 챙기는 것이든, ‘꼭 당신이어야 해요. 당신이 아니면 안 돼요.’라는 간곡함으로 어떤 소임을 수행하는 것이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에게 무엇인가를 헌정하는 실제적인, 내적인 온갖 몸짓’ 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헌사(dédicace)’라고 말한다. ‘러브콜’은 ‘사랑’의 자리를 교묘하게 ‘필요’로 대체하면서 헌사의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필요하니깐 부르는 것이다. 사랑을(love) 부르짖으면서(call)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오랜 속성을 배제한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당신은 당신이 길들인 장미를 영원히 책임져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러브콜’은 ‘영원’을 ‘순간’으로 모면하면서 더는 책임 따위가 사랑의 속성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다. ‘구애(求愛-love call)가 끝나는 순간 애(愛)는 따라서 소실’된다.
그러나 구애 이후 또 다른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즉 ‘사랑에 빠진’ 이에게 “시작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끝낼 수는 없는 것, 바로 그것이 구애”라는 김영민의 말은 매혹적이다. 그 스스로 ‘사랑이 심리학이 되는 순간 부패하기 마련’이라지만, 흔해빠져 널리고 널린 사랑. 하다못해 길에서조차 넘쳐 반라의 전단이 발길에 차이며, ‘사랑’이 더는 담론의 영역에서 머물지 못하는 때에 사랑의 심리학은 얼마나 우아한 부패인가.

무릇 연인은 늘,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결여에 시달리는 법이다. 그 시달리는 방식은 은밀하고 집요하다. 수동과 능동의 정서가 변덕스럽게 교차하면서 양철판을 긁듯이 간지럽힌다.

<사랑, 그 환상의 물매>에서 김영민은 반복의 구조를 유지하는 사랑의 메커니즘을 ‘물매(기울기)’라는 용어를 빌어 설명한다. 사랑의 출발은 시소를 타는 것처럼 타자와 내가 비슷한 무게중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가능하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서 꿈쩍도 안 한다면 시작은 됐지만 이어질 수 없다. 나보다 우위에 있으며 내게서 떨어진 타자로부터 나는 떨어지지 못하기 마련이다. 균형 속에서 동시에 매 순간 놀이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도 함께 작용한다. 이러한 물매의 반복으로 ‘자의성’은 잊히고 기억은 타자가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거나 ‘낮은 위치’에 있다는 비대칭으로, 이는 다시 상처로 자연스럽게 고착된다. 얼핏 기억, 상처, 결여, 비대칭 등등 사랑을 둘러싼 단어들은 치명적인 것들의 집합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환상을 통해 적절하게 ‘현실의 수위와 지평’을 조절한다.

그가 자서에서 말하듯 “사랑은 그 무엇보다 그 열정의 기울기에 따른 사소한 차이들의 나르시시즘이다. 현실의 물매가 환상을 낳고 그 환상의 물매는 사랑을 번성케 하는 법. 현실과 환상이 겹치는 만큼 당신은 어제처럼 내일도 사랑할 것”이다. 그치지 않고 삐거덕거리는 시소음, 그것이야말로 ‘끝낼 수 없는’ 구애이다.

밑줄을 긋다

독학자-배수아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고는 이 책 어디에 밑줄을 그었을까 들춰본다. 짚이는 대로 빼어 든 게 배수아의 <독학자>이다. 독학자라니, 이왕이면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정도가 손에 잡혔으면 줄거리만 가지고도 충분한 이바구가 됐을 걸.
한 때는 책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밑줄 긋기를 꺼렸다. 그냥저냥 낙서로 여겼을 뿐이며 어떤 밑줄은 넘어오지 말라는 선으로 다가와 그쯤에서 책을 덥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헌책방을 다니면서 점점 낯모르는 이들의 밑줄을 쫓는 재미를 알았고, 조금 더 지나서는 자를 대지 않고도 찍찍 밑줄을 만드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됐다.

<독학자>를 보자면 몽상은 관념에 뿌리를 내리고 숙주처럼 기생한다.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지만 한순간에 선명하게 나뉜다. ‘독학자’는 독한자이다. 흡사 박일문의 <살아남의 자의 슬픔>에 나오는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이처럼 여겨진다. 그 끝에 다다라서는 대체 몽상가이거나 관념론자가 되는 수 말고 다른 게 있을까. 물론 덕후(オタク)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책을 통해서 많은 죽음을 읽었다. 그러나 어느 책에서도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과 같은 태도는 읽지 못했다.’ 이것이 독학자의 비운이다.
소설의 ‘내’가 ‘그려낸’ 마흔을 위한 ‘팬터지’, 그 지난한 밤과 주말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나는 어쩌다가 심심함이 지나쳐 죽을 것 같은 날에만 책을 본다. 게다가 대체로 혼자 잘 노는 까닭에 그닥 심심해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책은 일 년에 채 열 권을 읽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흔 살까지는 어떤 영감을 받더라도, 독후감 이상의 것은’ 쓸 수 없다. ‘쓰지 않겠다’와 ‘쓸 수 없다’ 이것이 소설의 ‘나’와 나의 가장 큰 차이이다. 이쯤에서 다행인 건 <독학자>에서 밑줄을 발견한 것이다. 단 한 곳이지만. ‘인생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스스로를 표현할 것’이라는 P교수의 근사한 말도 아니고, ‘나’의 노동과 삶, 혹은 마흔에 대한 멋들어진 독백도 아니다. 지울 수조차 없게 초록 색연필로 찍하고 그어진 밑줄.

“범죄자는 자신의 행위를 분석하고 이해하고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 사고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반복해서 다시 세우고 그리고 그것을 치밀하게 기록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반복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편을 택한다. 범죄자는 그 행위, 범죄로부터 오직 도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도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망각이며, 망각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은 반복을 통한 무의식화이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을 만치 그에게 이 밑줄을 들이밀고 싶다. 이런 걸 달리 습관이라고 하자. 범죄자의 습관이건, 페미니스트의 습관이건, 설사 ‘고도’를 기다리는 습관이라 해도 무의식적인 반복은 귀와 눈을 멀게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 도피는 조금 지나서는 자기를 망각하는데 이른다. 결국엔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치는 무슨 말과 행동을 했든 간에 그리 뻔뻔해질 수 있었던 걸까.

아드리(adli)를 떠나는 사람들

참을 수 없는 것, 이라고 써놓고 내내 딴짓이다. 내게 참을 수 없는 것은 뭐가 있을까. 재미없는 책? 오토바이 소음? 버스에서 누군가의 통화로 낯모르는 이의 한 생애를 줄줄 꾀게 되는 상황? 마감을 초 앞에 둔 글쓰기조차도 곧 원고지 몇 장을 채우고는 덮을 테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이 정도는 이전 직장의 그들보다는 훨씬 참을 만하다.

오래 담아둔 이야기가 있다. 하룻밤을 푹 자도 잊히지 않고, 한 달이 지나도, 반년이 훌쩍 넘어도 가시지 않는 것. 이쯤 되면 참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그것은 현실에서 만난 오멜라스다. 어슐러 k. 르귄의「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오멜라스’는 살렘(오리건)-Salem(Oregon)을 거꾸로 읽은 것이다. 그 오멜라스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우리가 아드리(adli)를 떠난 것처럼 더는 참을 수 없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어슐러 k. 르귄의 소설은 건조하지만 메말라 있지 않다. 스릴이 넘치는 것도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것도 아니지만,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 ‘아’하고 감탄해 버리는 그런 소설들이다. 당신에게도 참을 수 없는 오멜라스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모르는 척하며 여전히 오멜라스에서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이면을 알기 전에는 퍽 괜찮다고 생각해 온 곳. 내게는 이전에 일하던 아드리(adli)라는 곳이 똑 그랬다.

오멜라스는 얼마나 멋진 이상향인가? 성직자 없이도, 군인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곳. 진실을 보기 전까지 누구든 부러워할 만한 곳이다. 오멜라스의 가장 외진 곳 지하에는 한 아이가 버려진 채로 고통받고 있다. 아이가 비참해지면 질수록 오멜라스의 겉보기는 더 화려해진다.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 그 모든 것은 아이의 처절함과 정반대에 선다. 진실은 오멜라스의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고 알게 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직접 겪고도 ‘설마, 그럴 리가’라며 애써 덮고, 어떤 이들은 그런 것쯤은 ‘사소하다’며 계속 오멜라스를 누린다. 혹은 떠나는 이들에게 ‘대체 당신들이 생각하는 오멜라스는 뭔데?’라는 비난을 던진다.

“…….고통스럽다면 반복하라! 그러나 절망을 찬양하는 행위는 기쁨을 비난하는 행위이며, 폭력을 용인하는 행위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더는 할 말이 없다. 더는 행복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으며 즐거움을 축복할 수도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몇몇은 오멜라스를 떠난다. 우리가 아드리(adli)를 떠나듯 하루나 이틀 정도 침묵에 잠겨 있다가 떠나기도 하고, 여자이든 남자이든 상관없이 떠난다. 넷이 함께 떠나기도 한다. 그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아는 듯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그리고 아드리(adli)를 떠나는 사람들은.

무수한 편재

김승희는 『왼손을 위한 협주곡』 자서에서 ‘죽은 사람은 하나의 不在가 아니라 무수한 遍在’라고 말한다. 사진에 대해 얘기하면서 죽음을 꺼내는 게 뜬금없어도 이 말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사진’이다. 죽음 혹은 사라진 것들, 기억에서 망각된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고통과 찌름으로 연속된 사물들이다.
우리의 마음을 떠난 것을 기억하는 것은 사물이다. 사물은 차츰 기억을 떠올리고 그 안에 투영된 마음까지도 형상화하곤 한다. 그것은 롤랑 바르트가 프루스트를 빌어 말하는 ‘반과거’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매혹의 시제들. 사진은 숙주가 되어 사랑의 정경을, 처음의 황홀했던 순간을 뒤늦게 만들어낸다. 그러나 진실은 <토스카>의 아리아(E Lucevan Le Stelle)처럼 잿빛이다. “별은 빛나고 있건만” ‘그러나 그 행복은 결코 그대로는 돌아오지 않는다'(『사랑의 단상』).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행복, ‘실존적으로 결코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것을 기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사진의 특징이다. 롤랑 바르트는 『밝은방』에서 이것을 현상학적으로 풀어낸다. 『밝은방』은 샤르트르의 『상상적인 것』에 경의를 표하는 오마주로 시작한다. 그것의 부제는 ‘상상력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이고 롤랑 바르트는 현상학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사진을 찍은 이의 입장을 철저하게 배제하며 사진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에포케가 그의 눈을 통해 얼렁뚱땅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나폴레옹의 막냇동생 제롬의 사진을 보고서, “나는 황제를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는 놀라움을 마음껏 표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사진의 미덕이다. 그냥 관람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굳이 바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스투디움(studium)-나는 좋아한다’으로, 사진을 보는 것으로 충분히 즐거움을 가지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푼크툼(punctum)-나는 사랑한다’에 현혹된다면 사진은 이제부터 부재하던 것이 편재되는 매개이다. 그 기억들. 내 정신을 헤집던 것들. 다시 움트는 상처로, 온통 푸른 멍으로 몸은 또다시 옹송크려질 것이다. 슬픈 영화를 볼 게 아니라 옛 앨범을 뒤적이면 된다는 말이다.

바르트의 시대는 갔고, 누구나 하나쯤 들고 다니는 카메라, 거기에 관련된 책이라면 실은 『밝은방』 같은 게 아니라, ‘포토샵 보정’에 같은 게 훨씬 유익할 것이다. 얼마 전 친구가 그러더라. “뽀샵이야말로 백익무해다.”라고. 사진첩을 정리하며 ‘어, 어, 이거 뭐지’하며 보고 또 봐도 기억이 안 난다면 역시 『밝은방』따위는 던져버리고 포토샵 관련 책을 보는 게 현명하다.

황금 노트북 / 도리스 레싱

『황금 노트북』은 안나 울프(Anna Wulf)에 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안나가 쓰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주인공이자 작가이면서 동시에 서술자의 역할을 하는 안나 울프의 의식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안나의 의식은 ‘검정 노트북’, ‘빨간 노트북’, ‘노란 노트북’, ‘파란 노트북’ 네 권의 노트북과 내부의 ‘황금 노트북’ 그리고 ‘자유로운 여자들’간의 시공간을 오가며 전개된다.
처음 네 권의 노트북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안나의 여러 국면을 반영하고 있다. 검정 노트북은 젊은 날 작가로서 안나 울프의 성공을 비판적으로 보며, 백인 인종주의와 흑인 원주민의 갈등, 작가로서 안나와 한 개인이자 여성인 안나 사이의 갈등을 드러낸다. 검정 노트북이 끝날 때 안나는 이상주의적 열정으로 사회주의 이념과 정치활동에 참여하던 자신의 젊은 날에 수치심에 찬 냉소를 보낸다.

“이건 향수로 가득 차있다. 단어마다 향수가 서려 있다. 쓸 때는 객관적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무엇에 대한 향수란 거지? 알 수 없다. 그것들 가운데 무엇이든 다시 경험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을 뿐이다. 그때의 ‘안나’는 적, 아니면 너무나 잘 알아서 보고 싶지 않은 옛 친구와 같은데.”

공산당원으로서 정치적 경험을 기록한 빨간 노트북은 정치 참여에 대한 좌절과 실패를, 노란 노트북은 안나와 마이클의 연애와 결혼을 토대로 남녀관계의 갈등과 낭만적 사랑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제3의 그림자’라는 소설로 그려낸다.
파란 노트북은 안나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소설로 허구화 하는 것이 현실도피라 여긴 안나가 ‘일기’를 통해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토미와 몰리가 다투는 곳에서 벗어나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즉시 그 장면을 단편소설로 바꾸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 -모든 것을 허구로 변형시키는 것- 은 일종의 도피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왜 나는 결코 단순히 일어나는 일만을 기록하지 않는 걸까? 왜 일기를 쓰지 않는 거지? 내가 모든 것을 허구로 변화시키는 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감추려는 일종의 수단임이 명백하다. (…) 이제부터는 일기를 쓸 테다.”

안나는 일기 속에서 오랫동안 자신이 주변에 의도적으로 방관해 왔거나 혹은 기억에서 억제해 왔던 경험의 조각들과 대면하기 시작한다.
네 권의 노트북들은 전부 사라지고 내부의 황금 노트북이 등장한다. 이 노트북은 파편화된 안나들 간에 내재하고 있던 긴장들을 해결하는 위치에 자리하면서 네 권의 노트북을 한 권으로 통합하고 있다.
또 다른 내부 소설로써 전체 소설을 감싸는 ‘자유로운 여성’에서 안나는 객관적인 서술자로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전개한다. 현재를 사는 안나는 삶의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과거의 이상적인 안나와는 달리 더는 사람의 ‘유일한’ 진실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안나는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직시하고 내부와 주변의 혼돈을 포용하며 이야기를 쓴다.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하며 기대하는 역할 간의 갈등, 예술가로서 안나와 개인으로서 안나의 갈등, 이성과 감정의 괴리들로부터 안나가 획득하는 비전은 ‘인간의 의식과 이성으로 사회 이념과 신화, 가치체계가 분류되고 이름 붙여지고 테두리가 둘리기 이전의 상태’이다.
“지금 세계를 돌아보면 어디나 우리가 바라보는 구름처럼 변하지 않거나 해체되지 않는 생활 방식은 없다.”라는 도리스 레싱의 말은 안나의 비전을 이어간다. 여성과 남성 등의 성별 구분으로 대변되는 ‘모든 이분법적 원리를 벗어나,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공존하는 삶의 실체를 체험’하는 것이다.

새터황금노트북2

도리스 레싱의 자전적 소설로 일컬어지는 『황금 노트북』은 1962년 출간된 후부터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스트 선언’으로 여겨졌다.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의 평가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도리스 레싱은 1973년 판 『황금 노트북』 서문에서 “이 소설은 여성해방을 위한 트럼펫이 아니다.”라며 이러한 논의를 일축한다.

“『황금 노트북』이 수많은 여성적 감정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 나는 이 책이 페미니즘 운동 이후 창조된 것처럼 보이는 여성의 태도들이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쓰고 있다. (……) 이 책의 핵심, 그것의 구조, 그 속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이것저것으로 분리시키고 구분 지어서는 안 된다.”

『황금 노트북』은 1950년대 여성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레싱 역시 여성 권리를 명확하게 옹호하고 있다는 평이 지배적인데도, 서문을 들며 ‘작가는 페미니즘과 연계를 거부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리스 레싱은 당대 여성운동의 움직임과 그 과정 그리고 성과를 주시하고 있었고, 이 소설이 사회에 시사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서문을 통해 반대한 ‘분리’와 ‘구분’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페미니즘 진영의 큰 축이었던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경계로 해석될 수 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이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이익을 얻고 있으므로, 남성도 적으로 간주하며 여성만의 자율적인 여성운동이 필요하다고 봤다. 따라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찬미하며 어느 정도 분리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칫 여/남 구분에 따른 계층적이고 이중적인 사고방식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도리스 레싱은 『황금 노트북』이 여/남 간의 투쟁으로만 읽히는 것에 반대하며, 급진적 페미니즘이 국지적이라며 무조건 지지하기를 거부한다. 『황금 노트북』이 형식이나 주제에서 어느 하나의 의미로 고정할 수 없으며, 그러한 이유로 자신의 작품이 결코 ‘페미니스트 선언서’의 위치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소설에서 남녀의 문제뿐만 아니라 계급 간의 차별이나 인종차별 등을 아우르며 여성문제를 ‘분리된 여성의 문제’로 한정시키지 않고, ‘모든 억압받는 집단의 해방’이란 차원까지 확대한다.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가 『경계 없는 페미니즘』에서 ‘다차원적이면서 동시에 편협함을 들어내는 경계들 간의 긴장에 주목하여, 우리 일상생활의 경계들을 통과하며, 경계들과 더불어 그리고 경계들을 극복하는 해방의 잠재력을 지닌 페미니즘’을 말할 때, 도리스 레싱이야말로 ‘경계 없는’ 페미니즘에 가장 잘 들어맞는 작가 중 하나일 것이다.

아홉 생명 / 어슐러 르 귄

LOS ANGELES - DEC 15: Ursula Le Guin at home in Portland, Origon, California December 15 2005. (Photo by Dan Tuffs/Getty Images)  *** Local Caption *** Ursula Le Guin
LOS ANGELES – DEC 15: Ursula Le Guin at home in Portland, Origon, California December 15 2005. (Photo by Dan Tuffs/Getty Images)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단편 ‘겨울의 왕’은 『어둠의 왼손』의 시발점이 되는 작품이다. 어슐러 르귄은 『어둠의 왼손』에서 게센인-양성인간을 시종일관 남성형(he)으로 씀으로써 많은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 어슐러 르귄은 『바람의 열두 방향』에서 ‘겨울의 왕’을 개정하고, he로 표기됐던 양성인간-게센인을 칭하는 보통명사를 모두 she로 바꾼다. he가 she로 변하면서 어떤 아이의 아버지는 she가 되는 식으로, 여/남이라는 이분은 뿌리째 뒤흔들린다.

어슐러 르귄은 『어둠의 왼손』 서문에서 SF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 소설가들의 임무는 상상력이 현 세계에 갇히지 않도록 미래를 재현하고, 이를 통해 ‘이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메타포를 제시하는 것이다. 어슐러 르귄이 “모든 허구는 은유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 세계에 대한 은유이다. 그가 ‘겐리 아이’의 입을 빌려 말하듯 “진실은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어둠의 왼손』의 큰 줄기는 우주연합 ‘에큐멘’에서 파견된 ‘겐리 아이’와 게센 행성의 ‘에스트라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게센인과 마찬가지로 에스트라벤 역시 남성(he) 이며 또한 여성(she)이고, 또는 어느 쪽도 아니다. 게센인들은 한 달 중 대부분 시간을 성적으로 중성 상태에 있다가 단 며칠만 ‘케머’라는 왕성한 성적 발정기를 겪는다. 케머 초기의 상태에 있는 두 게센인은 하나는 여성으로 다른 하나는 남성이 되어 성 관계를 갖고, 각자 중성으로 되돌아온다.
다음 달에는 남성, 여성의 역할이 바뀌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각 게센인은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게센 행성에서 고정화된 성행위는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에큐멘의 사절인 겐리 아이는 게센 행성에선 외계인일 따름이다. 지구인인 그는 항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케머’ 상태에 있는 성도착자이며, 게센인이 볼 때는 오직 하나의 성으로 고정된 불완전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인 겐리 아이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을 여/남으로 구분하는 고정관념을 버리기가 어려웠고, 때문에 게센인의 본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테두리에 그들을 끼워 맞추는 실수를 하곤 한다.
제1차 에큐멘 조사원 보고서는 겐리 아이 같은 사절단을 위해 충고를 남겨 놓는다.

“여러분이 게센인을 만난다면 남자와 여자가 있는 양성사회에서 하듯 행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같은 성 또는 반대 성 사이의 양식화 된 즉 남녀 간의 상호작용을 기대하고 그들에게 남자 또는 여자의 역할에 상응하는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적•성적 상호작용이 보여 주는 그러한 양상은 이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을 남자와 여자로 보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상상력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기란 힘든 일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를 봤을 때, 우리가 던지는 최초의 질문은 무엇인가?”

게센 행성은 태어난 아이를 두고 ‘남자야? 여자야?’ 같은 질문이 아예 성립될 수 없는 사회이다. 어슐러 르귄은 인간의 성별화 변용을 통해 사회구조와 개개인들이 그들의 많은 부분을 성별 구분을 통한 분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다. 그것은 소설이 발표될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하지만, 더불어 이러한 문제의식은 소설이 발표된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에큐멘 조사단원의 보고는 계속된다.

“행성 겨울에 오게 될 선발대원이 아주 침착하거나 나이 든 사람이 아닐 때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 쉬우므로 특히 주의해야 한다. 남자는 으레 그의 남성다움을 과시하고 싶어 하고 여자는 그의 여성다움이 존중되기를 바란다. 그것도 간접적으로 우아하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겨울 행성에서 그러한 것은 통하지 않는다. 각자는 오직 하나의 인간이라는 존재로서만 존중되고 판단될 뿐이다. 그것은 사실 소름끼치는 경험이다.”

어슐러 르귄은 겐리 아이와 에스트라벤를 통해서 상대방을 성에 상관없이 한 인간인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the_winds_twelve_quarters.jpg

『바람의 열두 방향』 -아홉 생명
「아홉 생명」은 인간 복제를 다룬다. ‘마틴’과 ‘퓨’는 ‘라이브라’ 행성 실험 기지에 파견되어 있다. 그 둘의 임무를 지원하고자 ‘10클론’이라는 한 사람의 창자 세포로부터 만들어진 10명의 복제인간이 기지를 방문한다. 남자 다섯과 여자 다섯으로 구성된 복제 인간은 동일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때론 그들 모두가 한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퓨’가 10클론 중 한 쌍의 남녀가 섹스하는 것을 보고 근친상간인지 자위인지 모르겠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각자가 개별적 인간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머리와 10개의 몸을 가진 인간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클론의 특성으로 그들은 주어진 작업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해내지만, 결국 사고로 아홉의 클론은 죽고 ‘카프’만이 남게 된다. 살아남은 카프는 생애 처음으로 ‘다중 자아’를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서서히 자기 자신, 즉 인간에 대해 성찰을 하게 된다.

「아홉 생명」 1968년 「플레이보이」에 처음 실렸는데, 어슐러 르귄이 보낸 원본 원고에서 ‘사소한’ 부분이 바뀌어 출간되었다. 필명 또한 ‘어슐러 K. 르귄’이 아니라 ‘U. K. 르귄’으로 표기됐다. 어슐러 르귄은 이에 대해 “편집자나 출판업자가 자신을 ‘여류 문필가’로 취급하며 성적 편견을 보였던 생애 최초이자 유일한 경우였다”라고 말한다. 비록 「플레이보이」를 통해 SF가 대중적으로 크게 전파되는 계기가 됐지만 그들의 수준은 소설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플레이보이」가 바꿨다는 ‘사소한’ 부분은 ‘마틴’과 ‘퓨’ 두 남성에 관한 부분이다. 어슐러 르귄은 이들의 관계를 동성애로 나타내지만, 플레이보이는 이를 흡사 우정으로 보이게끔 하고 있다. 살아남은 카프가 퓨에게 던진 “마틴을 사랑하나요?”라는 질문을 「플레이보이」는 “마틴을 좋아하나요?”라고 바꾸어 놓았고, 퓨의 “그래, 사랑해”라는 대답을 삭제했다.

어술러 르귄은 퓨의 “… 우린 서로 외로웠어. 어둠 속에서 손을 내미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겠지?”라는 말에서 동성애를 ‘인간’ 사이의 자연스러운 성애로 묘사한다.

어슐러 르귄의 SF는 과학적 엄밀성을 넘어, 곳곳에서 드러나는 페미니즘과 동성애, 아나키즘의 요소를 통해 독자에게 ‘상상하라’고 “진실이란 상상하기 나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상상이야말로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 왔던 세계에 균열을 가하고, 그 틈으로부터 새로운 사고와 직관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소돔 120일의 구라

책의 내용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그 주변의 이야기를 양념으로 얹는다면 더 흥미진진해지기도 하다. 얼마 전 누군가 사드의 『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érités du vice 쥘리에트 이야기, 또는 악덕의 번영』을 빌려 달라고 해서 오만 책장을 다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Justine ou Les malheurs de la vertu 쥐스틴느, 또는 미덕의 불행』을 잘못 생각해서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인지 어쩐지 도통 모르겠다. 여하튼 찾아볼 만큼 찾아봤고 없다는 결론을 냈다. 사드의 번역서는 미덕의 불운이 번역된 적이 있고(『미덕의 불운』과 『쥐스틴느 또는 미덕의 불행』은 다른 책이다.) 과연 사드의 작품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성처녀의 욕망』이 ‘사드의 욕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외에 한 챕터를 빼먹었던 『안방철학』과 그 완역본인 『규방철학』, 그리고 워낙 유명해서 읽지 않고서도 이바구 까는 『소돔120일』 등이 있다. (『신부님의 금지된 장난』도 있다.)

소돔 120일을 한 호흡에 다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입에 침을 잔뜩 바르고 “우와 대단해요”라고 말해줄 것이다. 나는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가 차라리 읽기 수월했다. 책도 겨우겨우 읽어 냈을 뿐더러, 몇 년 전 파졸리니 회고전에서는 영화를 보다가 푸욱 자고 말았다. 여하튼 소돔 120일에 대한 메타 텍스트는 넘치고 넘치니 그걸로 욕구를 채우시고 단지 무늬에 대한 얘기를 할 생각이다.


소돔 120일

새터에서 번역 초판이 출간된 게 어언 16년 전이고 바로 판금 됐다. 후에 고도출판사에서 새롭게 나온 게 2000년이다. 이쯤에서 내가 번역자나 출판사를 씹는다 한들 판매에 영향을 줄 것도 아니요 망해버린 출판사를 욕 먹이는 일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으로 끼적인다. 이 우스개의 핵심은 출간 당시 동아일보 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동아일보 말고 한겨레에서도 똑같이 다뤘던 기억이 있다. 살펴보면 기자가 사실 확인을 안 하고 쓴 것이니 기사 자체가 소설일 수도 있다.

[동아일보 문화]-[새책] “내이름을 책에서 빼주오” `소돔 120일` 번역자 통사정“내가 번역자임을 알리지 말라”.

‘사디즘(Sadism)’의 어원이 된 사드 후작(1740∼1814)의 대표작 [소돔 120일]이 최근 재출간됐다. 한가지 이상한 점은 책 어디에서도 번역자 이름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일본 번역물을 마구잡이로 중역한 해적판일까.

고도 출판사 이춘화 대표는 ‘천부당 만부당’이라며 펄쩍 뛴다. “프랑스 고전총서를 모본으로 전문번역가가 1년 넘게 공들여 번역한 정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번역자의 신상에 대해서는 “유명대 불문과 박사과정을 마쳤다”는 말외에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이름이나 신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당사자의 뜻이 워낙 강력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담당 편집자는 “부모가 이 책을 번역했다는 것을 자식이 몰랐으면 한다고 통사정했다”고 귀뜸했다.

번역가조차 몸을 사릴 정도니 [소돔 120일]이 우리사회에서 아직도 ‘뜨거운 감자’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92년 새터 출판사에서 ‘용감하게’ 번역서를 냈을 때도 청소년보호단체 등 시민단체의 강력한 항의를 받아 초판 이상을 찍지 못했다.

하지만 사드의 작품에 대한 문학계의 시각은 ‘도착적인 에로티즘’ 이상이다. 이 책은 ‘이성 우월주의가 횡행하던 18세기에 서양의 합리주의를 전복시킨 저항문학’으로 평가받아왔다.

조르쥬 바타이유의 명저인 ‘에로티즘’ 같은 저서는 이 소설의 철학 버전과도 같다. 새터 출판사 서필봉 대표는 “지금도 문학 전공자들이 책을 살 수 없느냐, 복사라도 할 수 없겠냐는 문의 전화가 일주일에 3∼4통씩 올 정도”라고 말한다.

고도 출판사는 전공자를 겨냥해 책을 펴냈지만 내심 걱정하는 눈치다. ‘안전판’으로 표지에는 포르노물에나 등장하는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문구를 넣고 비닐랩으로 밀봉하는 성의를 보였다.

혹시 언론의 오해를 받을까봐 보도자료 만드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모 출판사에 편집자를 보내 홍보물 문구까지 감수(?) 받았을 정도.

이 대표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서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도 별 문제를 삼지 않을 것으로 본다”면서도 “행여나 과도한 여론의 관심을 받을까봐 걱정이다”고 속내를 털어놨다.(문화 윤정훈기자) 2000년 09월 01일

인간들의 구라는 뻔뻔하기도 하지. 10년 전 책을 토씨 몇 개 바꿔서 낸 게 다면서. 번역뿐만 아니라 역자의 앞머리도 똑같다. 고도 출판사와 새터 출판사의 앞 장 번역 비교이다.

sade4.jpgsade5.jpgsade6.jpgsade4.jpg

새터의 번역자는 황수원. 심효림 옮김으로 돼 있고(심효림은 『사드 신화와 반신화』를 번역하기도 했다.) 고도의 번역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정말로 새로운 번역자인데 그 새로운 번역자가 아이들 보기 낯깎여서가 아니라, 이전 번역을 그대로 베낀 게 낯깎여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설마? ㅋ 어찌 됐든 이 정도면 사기지.

세계여성소설걸작선

여성해방운동의 성서로 불렸던 『여성과 노동』의 작가 올리브 슈라이너(1855~1920)는 “나는 너무도 지쳐 있고, 미래가 오기도 전에 미래에도 지쳐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에 한번이라도 고개가 끄덕여졌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위안이다. 그가 21세기를 살았더라도 저 마음이 바뀌었을까 싶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디스토피아로만 단정 짓고 미리부터 끔찍해 할 필요는 없다.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은 SF(Science Fiction)가 지향하는 과학적 엄밀성보다는 새로운 상상력과 실험을 통해 현 사회와 인간을 되돌아보는 데 방점을 둔다. 실제로 SpeculativeFiction가 보여주는 유토피아에 꼭 다다르지 않더라도, 거기에는 새로운 말과 새로운 세계가 있고, 그것이 때로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SF는 아직 오지 않은, 혹은 발견되지 않은 세계를 근간으로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놓친 세계에서 “발견되지 않은 말”이 있다. 이 말을 만드는 작업에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시간적, 공간적,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력이 새로운 언어로 펼쳐진다. 이 말은 기존 언어 체계에 갇혀 있던 상상력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린다. SF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1940년대와 1950년대를 거치고, 1960년대 뉴 웨이브와 함께 좌파 남성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인종과 계급, 반전을 다루는 작품이 늘었지만 그 안에서 여성의 위치는 여전히 종속적이었다. 그 남성 작가들의 세계관을 통해 여성과 젠더가 드러나는 방식은 사회의 시선과 일반 남성에게 내재된 것과 그닥 다르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뉴 웨이브’의 기치를 두고 ‘페미니즘SF’라는 새로운 조류가 형성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뉴 웨이브’는 SF에서 드러나는 테크놀로지의 상상력만큼, 모험적이고 진보적인 언어와 사회적 관점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이것이 페미니즘과 엮이면서 소설의 언어나 서술 상의 변화를 통해 정치와 생활양식에 대한 급진적인 양태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서서히 발표됐다.

페미니즘 SF 작가들은 고전적 소재였던 시간여행, 우주, 사이버 펑크 등에서 벗어나 새롭고 실험적인 주제를 도입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기존 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있던 이분법적인 성별 구조와 성차를 규정짓는 방식에 균열을 가한다.

image

조안나 러스의 말마따나, ‘SF의 세계에서는 고정된 남녀 역할에 따라 스토리가 전개될 필요가 없’었다. 페미니즘 SF 작가들은 여성/남성이라는 이분법을 뒤엎은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사회구조 속에 미묘하게 녹아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문제를 구호와 선언을 뛰어넘어 현 세계에 대한 은유로 제시했다.
페미니즘과 SF의 매혹적인 조합에 빠져들고자 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1994년 여성사에서 출간된 『세계여성소설걸작선』은 비록 SF라는 말은 빠져있지만, 훌륭한 페미니즘 SF의 길잡이다. 15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선집은 ‘뭘 읽어야 성에 차지?’ 하고 갈증에 탔던 이들에게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할 것이다. 달근달근하며 서서히 아드레날린이 몸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느끼게 되는 소설들로 꽉 차있어, 어느 하나 버릴 수 없이 술술 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늘 페미니즘 관련 서적에 오르내리던 조안나 러스나 『페미니즘 사전』으로 잘 알려진 리사 터틀의 단편들을 만날 수도 있다.

리사 터틀의 「남자의 여자」(The Wound)나 조안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When It Changed), 존 발리의 「레오와 클레오」(Options),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Houston, Houston, Do you Read?)등은 남녀 이외의 성별이 존재하는 사회, 생물학적 성징이 없던 인간이 특별한 계기로 성이 분화되는 사회, 한 가지 성만 남은 사회에 다른 성이 나타난다거나, 성전환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사회 등을 다루었다. 그 과정에서 현실 사회의 차별적인 성역할 분담이나 그 속에 숨어있는 가치관이 실제로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여실히 드러낸다. 페미니즘 SF는 성별 구획에 갇혀 살아가던 사회의 젠더 구조를 흐트러뜨리며, 전혀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점친다.

image

특히 조안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는 출간 당시 엄청난 논쟁에 휘말렸다. 최소 8백 년 동안 남성이라고는 없었던 ‘와일어웨이'(Whileaway), 천 년 후의 지구를 무대로 하는 소설은 그 세계에 “그들이 돌아왔어요! 진짜 지구 남자들이요!”라는 외침과 함께 남성들이 들이닥쳤을 때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를 적나라하게 파헤치자면,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이야기하던 ‘여성들의 사회적 여건을 개선하라’는 주장들로 가득하다. 이런 이유로 당시 조안나 러스의 작품을 실어 주는 출판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갈 곳을 못 찾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는 후에 SF 역사상 가장 큰 획으로 일컬어지는 할란 엘리슨(Harlan Ellison)의 앤솔러지 『다시, 위험한 상상력』(Again, Dangerous Visions 1972)에 실리게 된다. 그 직후 SF에서 휴고상과 더불어 가장 권위 있는 네뷸러 상을 받는다. ‘와일어웨이’는 1975년 페미니즘 SF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피메일 맨』(The Female Man)으로 이어진다.
극으로 치달은 가정폭력을 다루는 팻 머피의 「식물 아내」(His Vegetable Wife)와 「나뭇잎 사이의 여인들」(Women in the trees) 그리고 코니 윌리스의 「섹스 또는 배설」(All My Darling Daughters), 수젯 헤이든 엘긴의 「그레이스 고모를 위하여」(For the Sake of Grace) 등은 SF만의 형식으로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

행여나 끌어온 미래마저 우울해진다면, 이 책의 마지막을 어슐러 k 르귄의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Sur)로 마무리 짓기 바란다. 딱 그만큼의 관용으로 남성들의 세계를 내려보며 ‘애쓴다’라고 한마디 되뇌면 충분한 위로가 될 것이다. 외에도 15편의 페미니즘 SF가 보이는 세계는 우리가 맞닥뜨린 세계를 조롱하고, 분노하고, 때론 헤집으며 ‘여성의 이미지’를 다시 읽을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화성 연대기

미래를 향해 노스탤지어를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이 설사 디스토피아 일지라도 말이다. 『화성 연대기』를 읽어가는 것은 미래를 찾아가는 것이고 과학이 골렘으로 변한 날들과 대면하게 되는 과정이다. 미래가 암암한 과거의 기억처럼 오다 어느 순간에 아긋한 조각들이 맞춰지고 진심으로 나는 화성인이 되는 것이다.

“They knew how to live with nature and get along with nature. They didn’t try too hard to be all men and no animal. That’s the mistake we made when Darwin showed up. We embraced him and Huxley and Freud, all smiles. And then we discovered that Darwin and our religions didn’t mix. Or at least we didn’t think they did. We were fools. We tried to budge Darwin and Huxley and Freud. They wouldn’t move very well. So like idiots, we tried knocking down religion. We succeeded pretty well. We lose our faith and went around wondering what life was for. If art was no more than a frustrated outflinging of desire, if religion was no more than self-delusion, what good was life? Faith had always given us answers to all things. But it all went down the drain with Freud and Darwin. We were and still are a lost people.”

“그들은 자연과 함께, 자연과 어울려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려고 하지 않았지요. 바로 그 점이야말로 다윈이 나타난 뒤로 우리가 저지른 크나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웃는 얼굴로 다윈과 헉슬리와 프로이트를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다윈과 우리가 가진 종교가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지요. 아니, 적어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바보였습니다. 우리는 다윈과 헉슬리와 프로이트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바보였기 때문에 우리의 종교를 쓰러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시도는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잃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이 단순히 좌절된 욕망의 장식에 지나지 않고, 종교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면 인생에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신앙은 모든 일에 해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프로이트와 다윈과 함께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방황하는 인간들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 The Martian Chronicles』는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과학에 기초한 sf보다는 환상문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복고풍 분위기나 앞의 인용처럼 종교적 에피파니(epiphany)도 물씬 풍기는 작품이지만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에도 그의 소설이 낡삭아 보이지 않는 것은 외려 과학 지식에 기초한 sf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어쩌다 인종/여성차별에 대한 뉘앙스로 불편하기도 하지만 로버트 하인라인이나 에드가 라이스 버로스의 마초이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리사 터틀이나 조안나 러스, 어슐러 르 귄이 활동하기 전에 대체 그렇지 않은 작품이 없으니 르 귄이 “SUR –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에서 보인 관용으로(꼭 그것이어야 한다) 충분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까뮈가 그르니에의 『섬』을 두고 “오늘 처음으로 이 책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고 말했던가. 더도 덜도 말고 『섬』에 두른 이 휘장을 화성연대기에 덧댄다고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이 『화성 연대기』로 인해 sf에 대한 내 편견은 산산조각이 났고 후에 번역된 거의 모든 sf를 보게 됐다. 그것은 다른 빛나는 SF 작가들과 조우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내게 단 한 명의 sf 작가를 꼽으라면 어슐러 k. 르 귄을 꼽을 것이지만 단 한편의 sf를 꼽으라면 『화성 연대기』를 꼽을 것이다.

덧 – 『화성 연대기』는 모음사 동서추리문고 두 군데에서 나왔지만 오래전에 절판인 상태고 헌책방에서도 꽤 안 보이는 책이다. 모음사에서 87년과 90년 두 번에 걸쳐 나왔는데, 내가 가진 것은 90년 모음사 판이다. 이 판형은 책 표지를 바꾸면서 ‘개정’이니 ‘재판’이니 하는 표시가 없다. 뿐만 아니라 책 표지에 ‘대이 브래드버리’라는 우습지도 않은 실수를 했다, 정작 큰 실수는 마지막 한 페이지가 누락된 것이다. “마이클이 말했다” 마이클이 뭐라고 했는지 알고 싶으면 87년 판이나 동서추리문고 판을 찾아봐야 한다. 누구든 이 책을 읽는다면 마이클의 다음 말 때문만이 아니라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주체할 수 없어서 당장에 도서관으로 달려갈 것이다. 헌데 도서관에도 90년 판밖에 없다면 굉장히 슬프겠지.

마이클이 말했다. “나는 화성인이 굉장히 보고 싶었어요. 어디 있지요, 아빠? 보여주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아버지는 마이클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리더니 아래의 수면을 가리켰다. 화성인이 그곳에 있었다. 티머시는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화성인이 그곳에, 운하 속에, 물 위에 비치고 있었다. 티머시와 마이클과 로버트와 엄마와 아빠가……. 화성인들은 잔 파도가 찰랑거리는 수면을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브레드버리의 단편은 『플레이보이 sf걸작선』같은 모음집에 간간이 실려 있고, 외에도 『화씨451』과 『멜랑콜리의 묘약』『살아있는 공룡』이 번역됐으나 단행본들은 아쉽게도 죄다 절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