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mals Aufgeben!

never give up Niemals Aufgeben
내게 무엇이던지 저만큼 가치 있는 것이 있던가. 대가리 꼿꼿이 세우고 생각컨데 나는 너다. 이 삽화를 보는 내내 엉뚱하게도 모르스 앙리(Maurice Henry)의 데생이 오버랩 된다. 나는 자학의 시간이 길다. 개구리야 주먹을 더 굳세게 쥐렴, 황새야 세상은 늘 노랬잖니. 나는 힘껏 옭매던 밧줄을 놓을 테니 내 두 발은 시궁창이어도 좋아라.

<Never ever Give up>의 출처가 궁금해서 여기저기 뒤져봐도 그린 이에 대한 정보는 없다. 모리스 앙리의 데생은 <동키호테의 탈출/열화당> 중에서, <Niemals Aufgeben> 그림 출처는 아래 사이트.

http://www.stud.uni-hannover.de/user/68837/funpics.htm http://www.zabbal.com/sitemap/Homepagebilder/never.jpg


다시 한 번 3월은 힘차게! (으이구 <신화 속의 여성> 가져 간 사람 자수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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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 풍경과 상처

풍경과 상처
김훈은 무엇보다 풍경과 상처의 작가이다. 그의 마침표 끝에서는 어떤 풍경들이고 고스란히 살아난다. 무턱대고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내 과거의 편린들이 그의 결을 따라 한뜸 한뜸 기워 엮인다. 뒤돌아 보건대 덮었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풍경은 온전치 않다. 말들이, 단어가 움직이고 나는 내 기억으로 비틀거리며 선다. 면도날에 손을 베인 것처럼 금방 선명하게 핏빛이 그어진다. 그러나 기억들은 흘러넘치는 법이 없다. 피들이 덩이져 굳어지듯 내 기억들은 그렇게 풍경마다 하나의 상처를 안고 응고되어 있다. 풍경도 상처도 과거에만 있다. 꿈같다.
온전히 10년 전 풍경과 상처를 읽었다. 우리말이 이처럼 빼어나다는 느낌을 나는 그에게서, 그의 두 쪽짜리 서문에서 배웠다. 언제고 장석남의 시를 읽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빚지는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듯이 꼭 그랬다. 풍경과 상처를 해를 두고 책을 달리해서 읽는다. 나는 그의 초판 서문보다 재판 서문을 더 좋아한다. 낱말 하나가 들어가고 빠진 셈이지만 그 낱말 하나는 김훈의 글쓰기를 오롯이 버텨내고 있다. 그 모양새야말로 어떤 수사 없이 누구고 사는 모습이라. 초판의 서문에서 ‘김훈은 씀’이라고 끝맺는 것을 재판에서는 ‘김훈은 겨우 씀’이라고 고쳐 쓰고 있다. ‘자전거 여행’에까지 이어지는 ‘겨우’야 말로 김훈이 글을 쓰는 자세일 터다. 써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안의 것들을 글로써 밀어내는 것, 안에 오래도록 지녔던 상처를 ‘겨우’ 내 몸 밖으로 밀어내는 일이다. 쓰는 내내 몸도 따라 아플 것이다.
아무리, 그래, 세월동안, 아무리, 말들을 흩뜨리고 풍경을 지워도 상처는 아물지 않더라. 이제야 짐작건대 멀리서는 소멸도 풍경이다.

Dolls / 기타노 다케시

Dolls

사랑은 단순한 신체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특히 대상을 열렬히 사모하는 경우에,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게 한다. 또 사랑은 우리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증거하는 힘이기도 하다. – 메를로 퐁티

돌스 (Dolls) / 기타노 다케시 – 타자와 만나기, 사랑하기
영화는 라는 로 시작되고 있다. 이 분라쿠를 공연장에서 관객들이 보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 공연을 담은 영화를 보고 있다. 그보다 바깥에서 나는 이 영화 Dolls를 본다. 메이도노 히캬쿠가 끝나면서 인형극의 두 주인공인 추베에와 우매가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마츠모토와 사와코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야말로 내 시선이 머물게 되는 곳이고, 나와 두 인형 사이의 간극(분라쿠와 그것을 공연장에서 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 것을 담은 영화를 보는 영화 속 사람들)이 허물어지는 곳이다. 간극이 허물어진다는 것은 앞으로 보일 몇 개의 짧고 진부한 이야기들이 영화 ‘속의’, 분라쿠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깥에 있는 나도 현실에서는 이 이야기들처럼 누군가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사랑’에 대한 담론은 시작된다. 타인과 만나서 엮이는 것 말이다. 헤어진 연인이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결혼식장을 빠져나가는 마츠모토, 그는 앞으로 보장된 삶을 아무런 미련 없이 버리고 정신이 나간 옛애인(사와코)에게로 간다. 그녀를 정신병원에서 데리고 나온 뒤 붉은색 끈으로 서로를 묶는다. 사랑을 위한 최초의 준비는 현재의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 자기를 낮추는 것, 희생하는 것이다. 사랑은 관계에서부터, 나 ‘이외’의 것을 ‘나’와 묶으면서 시작된다. – 사랑의 관계로 묶인 타자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 당신에게 결핍된 단 하나의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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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속도는 마츠모토와 사와코의 걸음과 함께 움직인다. 이들에게는 표정이 없다(dolls). 오직 묶인 끈만이 있다. 감독은 관객에게 당신들의 체험을 끄집어내라고 한다. 얼굴의 빈자리는 관객(사랑의 제3자)을 위한 자리이다. 사랑이 눈을 멀게 하는 것이라면, 이 말은 무엇보다도 끈으로 엮인 유일한 존재 이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 눈이 멀게 된다는 말이다. 즉, 얼굴(표정)을 잃는 것이다. 동시대에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또 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스친다. 바람개비는 무심히 그러나 격렬히 돈다. 그리고 온갖 표정의 가면들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들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 ‘가면’인가. 교통사고의 상처를 안고 모습을 감춘 아이돌 스타 하루나. 그녀를 몇 년째 흠모하는 소년(누쿠이)은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후 그녀를 찾아간다. 눈을 찌름으로써 소년은 ‘타인’에서 ‘타자’로 위치를 이동하게 된다. – 타인이 나의 존재를 훔쳐가는 사람이라면 타자는 나의 존재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 감독은 계속해서 당신은 사랑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됐느냐고 묻는다. 사랑은 하루나(타자)와 누쿠이(나) 사이의 불공평에서 출발한다. 사랑이란 타자가 언제나 나보다 우위에 있으며 내게서 도망가는 타자로부터 나는 도망가지 못하기 마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타인을 내 안에 가둘 수 있는 눈을 잃은 후에, 모든 주도권을 잃은 후에 현현한다. 누쿠이야 말로 하루나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소통 가능한 타자이다. 우리는 ‘나’를 온전하게 알아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던가. 상호성이 더는 신기루나 오해 소강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진실이 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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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을 들고 30년 동안 헤어진 연인을 기다리는 중년의 여인(료코), 추억은 멈추지 않고 거슬러 오래전 약속을 끄집어 온다. 문득, 자신을 끝까지 기다리겠다던 장소에 도착한 남자(히로) – 기억은 거짓말처럼 옛사랑을 현실로 되돌려 놓는다. 서로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관계는 새롭게 시작된다. 사랑은 모든 틈을 메우고 망각시킨다(고 믿는다.) 그(그녀) 역시 행복하다. 생애 어느 때보다, 그녀(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한 뼘의 자리만으로 ‘가장’ 행복하다. 귤을 미끼로 쓴 낚싯줄에서 고기가 입질을 한다. 사랑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에서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이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울림의 사실적인 핵심은 우발적인 것이다. 엄청난 우연들이 당신과 당신의 연인을 묶지 않았던가. 이제부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사랑의 동기가 아니라 구조 자체이어야 한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단풍을 들이민다. 단풍은 사랑의 색깔이다. 아픈 시간들, 4월의 바람과 뙤약볕의 여름을 지나고 나서야 얻은 핏빛의 색깔 –  당신은 저 아름다운 단풍을 시들 때까지(시들지 않는 단풍은 없다.) 지켜보겠는가, 가장 붉게 피었을 때 박제시키겠는가? 사랑은 소멸의 시효를 가지고 있다. 소녀(하루나)와 둘 만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소년(누쿠이)은 사고로 죽는다. 그 죽음은 소년을 계속 끝없이 ‘사랑하고 있는’ 상태로 지속시켜 준다. 그는 끝끝내 매달려 있는 단풍처럼 시들지 않을 것이다. 옛사랑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야쿠자 두목은 킬러의 총에 죽고 만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안타깝지 않다. 그는 가장 행복한 순간만을 기억하고 있고 그것만을 안고 죽음에 다다른다. 최고의 순간에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그것이 설사 핏빛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죽음으로써 사랑을 영속시킨다. 탐미적 수사 혹은 사의 찬미라고 말하며 ‘이것도 사랑일 수 있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감독은 찬물을 쏟아 붙는다. 소년이 자신의 사랑을 동결하며 흘린 핏 자국을 그것이 숭고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비누거품으로 쓱쓱 문질러 흔적을 지운다. 그리고 남겨진 자의 얼굴을 보여준다. 다시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아이돌 스타와, 옛 애인을 기다리는 중년의 여인. 사랑은 주관적 사유만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관계의 끈으로만 설명 할 수 있는 것이 남기마련이다. 그들의 행복만큼 ‘딱 그만큼’의 고통이 남겨진 자의 몫이 된다. 그 사랑의 그림자는 고통으로 – 타자에 대한 치유할 수 없는 폭력으로 남는다. 사랑은 끝나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환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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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끈으로 서로를 묶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츠모토가 사와코에게 결혼을 약속했던 장소, 그들의 추억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우리의 마음을 떠난 것을 기억하는 것은 사물(장소)이다. 사물은 차츰 기억을 떠올리고 그 안에 투영된 마음까지도 형상화하곤 한다. 그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반과거’ 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매혹의 시제이다(하루나를 위한 하모니카, 히로를 위한 도시락, 사와코를 위한 목걸이). 사랑의 정경은 처음의 황홀했던 순간처럼 뒤늦게야 만들어진다. 하지만 토스카의 아리아가 울려야 할 시간이다. “별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결코 그대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의 기억이 되돌아온다. 그 둘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어떤 구속도 없이 완전하다. 이 사랑은 어떻게 보존되거나 혹은 되돌릴 수 있을까. 그들은 처음으로 손을 맞잡으면서 사랑(사람)의 얼굴(표정)을 되찾는다. – 이것이야말로 기타노 다케시의 대답이다.

당신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달갑지 않은 사명으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똑같은’ 생의 무게를 요구한다. 함께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아파야 한다.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다. 그 온전한 사랑은 아무런 목적(표정)없이, 엮었던 관계의 끈이다. 그 끈은 누구도 남아서 더 고통받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서로의 고통(육체)을 지고 죽음까지 즉시 하는 것이다.

흐트러짐 없이!

김영하 / 무협학생운동

김영하 무협학생운동 표지
김영하 무협학생운동

김영하의 등단 작품은 누가 뭐래도 95년에 발표한 거울에 대한 명상이다. 어설픈 시뮬라크르와 나르시시즘 그리고 반전을 적절하게 섞여 나온 퓨전 소설. (제목도 그런가? 김이소의 ‘거울 보는 여자’와 ‘칼에 대한 명상’을 싹둑 잘라서 붙여 논 듯한, 김이소 소설이 나중에 나왔을까? 웃자고 한 말이니 패스 ^^)
김영하의 작품 중 하나를 꼽으라면 뭐가 있을까, 남진우를 대상으로 한 거 아니냐는 의혹을 남겼던『흡혈귀』? 일그러진 욕망과 판타지가 뒤덮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아니면 김영하 스스로 최고로 꼽는 『검은 꽃』? 무엇이어도 좋다. ‘김영하의 소설엔 서사가 없어’라는 평은 『검은 꽃』으로 시들었고, 도시에서 자라서 어릴 적의 경험이나 입담이 부족하다는 소설쓰기의 핸디캡은 도시적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훌륭하게 그려지고 있다. 작가 후기가 소설 전체를 반전시켜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썩 개운하진 않지만, 『아랑은 왜』를 떠올려 봐라.
스스로 김영하의 팬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의 소설 아닌 것도 찾아서 읽어보고 그의 궤적을 쫒고 있겠지. 나름대로 전작주의자를 꿈꾸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김영하의 첫 번째 소설은 무엇일까? 앞서 말한 등단 작이 첫 소설일까? NO
꽤 오래전 절판 되었고, 김영하의 이름이 한층 부각되면서 다시 찍어내자고 했다지만, 본인이 크게 탐탁지 않았다던 소설이 있다. 『무협 학생운동/ 김영하 / 도서출판 아침 / 1992』
이게 뭐야 하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말하자면 80년대 학생운동을 무협소설의 형식으로 극화한 것이다. 그도 가능 하겠다싶은 것이 당시에는 군부독재라는 악과 민주화 운동이라는 선의 이분법이 들어맞았으니, 즉 적과 아군이 분명했으니 꽤나 재미난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 수 있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공안부 짜바리들이 그랬단다. “이젠 x발 무협지 읽으면서 니들 잡으러 댕겨야 하냐?”.
73억 꼼쳐뒀다 발각된 전두환은 전두마왕으로 노태우는 노갈, 안기부는 안기마귀, 백골단은 백건단, 주사신공의 그 최고 일절 자주권… 등등 얼핏 보면 아주 흥미롭지만 더도덜도말고 여기까지다.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도저히 ‘그 김영하가 이 김영하 맞아?‘ 라는 생각을 떨 칠 수 없게 만드는 소설이다. 김영하는 잘 쓰는 정말 재밌게 말하는 작가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이 소설은 김영하를 통시성안에서 보게 해준다. 그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힘들었을 일이 주르륵 멋대로 연상이 되니 말이다. 이 소설이야말로 ‘쓰면 늘기 마련이다’의 최고의 예가 될 것이다. 모두들 열심히!! ^^
김영하는 진행형일까? 어디로?『무협 학생운동』 작가 후기의 끄트머리를 가져온다.
“…… 그리고 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한 때는 같은 강의실에 앉아 공부를 하였으니 지금은 자신의 등 뒤에 깔린 쇠사슬을 끌며 최루탄 연기 가득한 하늘로 날아간 영원한 이름, 한열이에게 이 글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
발굴지 : 일산 / 집현전 (약도보기)

헌책방 팁 1

헌책방 동호회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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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균무때(주방용) – 책 표지를 닦는 게 가장 탁월한 세제 중 하나이며 냄새가 역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세제뿐만 아니라 무엇으로 닦느냐 역시 중요합니다. 동네 ‘무조건 천원 코너’에 가시면 안경 닦는 천 비스름한 거 살 수 있습니다. 안경 닦는 천보다 두껍고 크죠. 이 두 가지가 준비되면 대부분 책을 새책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물파스 – 책 표지에 볼펜이나 사인펜 자국을 지울 때 물파스를 한 번 바르고 닦습니다. 아주 말끔해지죠. 가려운 데나 벌레 물린 데와 동시에 사용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 입니다.
도서관 인장이 찍힌 책
– 책 위에 아래에 여기저기 구석구석에 도서관 인장이 찍혀 있는 책을 만나면 아찔하죠. 유한락스를 이용합니다. 초보자에게 약간의 무리가 있어서 처음에 할 때는 두 명이 함께 하는 게 좋습니다. 우선 물러터진 칫솔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마른 헝겊. 유한락스를 콜라 뚜껑만큼 콜라 뚜껑에 담은 다음, 동생이나 집에서 노는 사람 아무나 데리고 와서 책을 꽈악 누르라고 하면서 칫솔에 유한락스를 발라 한번 살짝 쓰으윽 칠해줍니다. 바로 마른 수건으로 유한락스를 닦아 냅니다. 아주 적은 양을 해야지, 자칫 잘못하면 책이 울어버릴 수 있습니다.
책 첫 장에 도서관 인장을 도저히 ‘못 참겠다‘하시면, 그 뒤에 안 쓰는 종이를 데고 유한락스로 살짝 문질러 주면 됩니다. 종이를 대는 이유는 뒷장이 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책등에 스카치테이프 자국
책이 삐까뻔쩍하다가, 한 부분만 누렇게 뜬 경우가 있죠. 안은 한번 펴보지도 않아서 새 책인데, 겉에 그 누런 자국 때문에 이걸 살까 말까 망설이는 분을 위해서 특별한 세제를 소개합니다. 홈스타(욕실용)을 사용해서 닦아주면 그 누렇게 오래된 절대 지워질 것 같지 않은 때가 가십니다. 홈스타 같은 경우는 책 전반에 사용하는 것은 안 됩니다. 세제 자체에 돌가루 같은 게 있는지 책이 긁힐 수 있습니다. 여하튼 누런 부분만 살짝!
사포 – 흔히 빼빠라고 하죠. 잘 이용해야 합니다. 잘 못하면 책 전체가 뚱뚱해지고 보기 싫어지거든요. 두 가지를 준비합니다. 알이 고운 것과 중간 정도를 이용합니다. 책 위아래의 먼지를 털어 낼 때 쓰는 게 좋습니다. 글씨 지우려고 하다간 책이 망가지기 십상이니, 어지간하면 먼지 정도만 털어내는 데 이용하세요. 먼지가 10년쯤 묶은 외서 하드커버에 아주 적격입니다. 종이의 원래 색깔을 찾아 주죠. 한 30장 정도를 단위로 사포 질을 하는 게 좋습니다. 한꺼번에 하면 책이 싫어하겠죠.
막강파워 절단기
누가 쓰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지만 가끔 실뜨기하듯 책을 깎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신집중하고 수양을 오래해야지 가능하죠. 책장에 묻은 오래된, 묶은 남모르는 자국, 누가 지거 아니랄까 봐, ‘94211-.. 어쩌고’하며 이름과 학번을 매직으로 써 놓은 책에 최고의 효과를 보일 수 있습니다. 학교 앞 제본소 같은 곳에서 잘라달라고 하세요.
주의! – 대개의 책은 겉표지에 살짝 코팅이 됐습니다, 코팅이 안 된 책들도 있죠, 코팅 안 된 표지를 위의 세제를 썼다가는 아작입니다. 가끔 그런 분들 있던데, 조심하시길. 코팅 안 된 책은 지우개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때를 끈질기게 지우개로 지워내는 게 유일한 방법이죠.

발품을 팔아 마음을 채우는 곳

며칠 비가 추적거리는 게 몸이 한없이 늘어진다. 이런 날이면 한적한 곳을 싸돌아 댕겨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 할 일들을 주섬주섬 챙길 수 있다. 이따가 걷자며 곱살 진 마음을 달래는데 금세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려앉는다. 한적한 길로만 여기던 곳도 네온사인이 하나 둘씩 켜지면서 번화가 못지않게 오가는 이들이 많아진다. 골목 끝을 돌자마자 헌책방이라는 녹색 간판이 섰다.
퍽 오래 전에는 버스를 타다 ‘헌책방’이라는 팻말이 눈에 띄면 무작정 내리곤 했다. 그렇게 들어선 곳은 먼지 쌓인 책들만 모로 즐비한 곳도 있는가 하면 참고서를 사려는 학생들로 붐비는 곳도, 주인장은 책을 닦고 책 손 몇이 멀찍이 선 곳도 있었다.
이 녹색 간판의 책방은 어떨까 싶었다. 우산을 접어 문밖에 내려 둔다. 조금 빡빡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 냄새가 확 덮친다. 구석 백열등이 비추는 곳에 천장까지 빼곡히 누운 책들을 보자니 안도감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 헌책방이 먼 데 있는 기억을 친다. 그때도 꼭 백열전구 아래 이런 냄새가 났다.
신촌 근방의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사람들에게 치이는 곳보다 우산을 뱅뱅 돌려도 아무도 피해를 받지 않을 만큼 한산한 곳이 좋았다. 지금 홍대에서 신촌 방향의 길은 고작 서너 개 미술학원만 있을 뿐 오가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 길 한쪽께 작은 헌책방이 있었고 학교가 파하면 늘 들르는 곳이었다.
한창 입시로 바쁠 때도 친구와 책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지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책을 뒤적이곤 했다. 세로로 쓰인 글을 따라가며 모르는 한자를 서로 묻고, 큰 소리로 떠들다 핀잔을 듣기도 했다. 책방 아저씨가 문을 닫는다고 말해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우리는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곤 했다. 읽은 책에 대해 이것저것 갖다 붙이는 통에 이바구가 끊이질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해지나 연애를 시작했을 때도 파트너와 주로 ‘헌책방’에서 만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낡은 책 냄새는 상대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줬고, 좁은 공간은 서로에게 집중하며 작은 목소리로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상대의 말을 터치해 가면서 잘 이어갈 줄 몰랐고, 어느 즘에 찾아온 정적을 어쩔 줄 몰라 하며 상대가 무슨 말이든 하길 기다리는 처지였다. 그런 내가 끊이지 않게 말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책’과, ‘그 주변의 이야기’들이었다.
무엇보다 읽은 책들 중 밑줄 그었던 부분을 기억해 책을 고르고 상대에게 선물을 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나만큼 그도 기뻐하고 그만큼의 감동으로 벅찰 것이라고 혼자만 믿곤 했다. 아주 나중에 그는 헌책방에서 만나는 게 달갑지 않으며, 책보다 하다못해 천 원짜리 핀이 더 감동적이라고 전했다.
헌책방을 순례하듯 다니던 시절, 인천의 한 헌책방의 주인장이 ‘헌책방이 뭐 같아요?’라고 물었다. 자주 들락거리며 낯이 익자 건 낸 말이지만 좀처럼 가늠할 수 없기도 했다. ‘멀리서 오는 거죠?’라고 되묻고는 ‘헌책방은 발품을 팔아 마음을 채우는 곳’이라고 말했다.
한 무대기 책을 산 날이면 어서 집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책을 걸레로 닦고는 침대 옆에 두고 표지부터 찬찬히 살핀다. 저자 서문만 읽고 자자며 몇 장 들추다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날을 지새운 날도 밤이 짧은 것이 내내 아쉬웠다. 낡은 책 한 귀퉁이에 이전 주인의 부스러질 것 같은 메모에 밑줄을 보탠 날은 그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 모든 ‘우연’이 주는 갈래를 헤매는 건, 흡사 시작과 끝이 닿아 끝나지 않는 산책과 같았다. 그 몽상의 시간 동안에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숨소리만 가빴을 것이다. 책 읽기가 뭔가 대단한 것을 머리에 꾸역꾸역 넣자는 게 아니라,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허기진 마음이 채워지는 거지 싶었다.

출판사 – 컬리지언총서를펴내면서

헌책방에서 만난 출판사의 수를 헤아릴 수 있을까. 아직 동네서점 한 귀퉁이나 인터넷, 대형서점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출판사부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재미난 출판사까지. 책을 읽는 이들 나름대로 자신에게 특별한 출판사가 있을 텐데, 책의 내용을 떠나서 출판사가 책 구석에 슬쩍 적어놓은 글만으로도 정이 가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걸 찾아 읽는 맛도 쏠쏠하다.
[새와물고기]는 헌책방의 끝간데없는 베스트셀러일 것이다. 물론 시집이나, 유머집 같은 다소 엉뚱한 걸 낸 적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외국문학 선이다. 보네거트와 코진스키, 마가랫 애트우드를 만날 수 있는 출판사였으니 말이다.
보네거트의 『저 위의 누군가가 날 좋아하나봐』의 첫 장 “새와 물고기는 힘들면 다시 보이는 요지경입니다”를 시작으로, 『고양이 요람』에서는 “새와 물고기는 전자파의 세상에 생긴 아주 작은 대피소입니다”, 『죽음과 추는 억지춤 또는 어린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에서는 “새와 물고기는 둥근 것, 굽은 것, 물렁물렁한 것입니다”라는 짧은 글귀 들이 소설에 대한 기대를 더욱 부풀린다.
코진스키의 『거꾸로 선 나무 – The Devil Tree』의 “새와물고기는 가장 처음에 있었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입니다.”와 『눈먼 데이트』에서 “새와물고기는 세계로 향한 독자의 창입니다”는 조금 식상한 감이 있지만, 마가랫 애트우드의 『케잌을 굽는 여자 – The Edible woman』는 그 진부함을 뒤엎기에 충분하다. 갓 구워낸 케이크가 풍기는 신선함. “새와물고기는 이 세상에서 없어진 새들과 물고기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지금은 없어진 [새와물고기]에 심심한 조의를 표할 따름이다. 참고로 보네거트는 모조리 절판되는 불운을 딛고 얼마 전부터 ‘금문’에서 새로운 역자를 만나 재출간 되고 있다. 나로선 좋은 소설이니 환영이지만 왜 그렇게 비싼 건지. : (
[프로젝트 409]출판사는 장석남의 『별의 감옥』이라는 시선을 낸 적이 있다.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에 수록된 시와 별 차이는 없지만, 특이한 것은 매 페이지 요코(Yoko)의 삽화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빨간색 양장의 표지에 별의 감옥이라고 스티커를 붙여 놓은 것이 여간 촌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장석남의 시는 표지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반역이다. 의아한 것은 발행인이 이광호인 것인데(언제 출판까지 손을 뻗쳤단 말인가? 물론 더는 없으니 망한 거겠지? 😐 ), 그보다 더 재미난 것은 책의 맨 마지막의 카피다. “개와 JAZZ를 사랑하는, 휴머니즘과 프로페셔널을 추구하는 그룹-409!” 엽기 내지는 컬트랄 밖에.
[동문선]‘ 성종 때, 서거정이 편찬한 명문 선집(選集)’이라는 생각보다, ‘내 취향에 ‘딱’인 책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출판사‘라고 말하는 이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혹자는 출판사 이름을 불문선으로 바꿔야 하지 않느냐고 농을 던지기도 하는데 여하튼 양서를 끊이지 않고 찍어내는 출판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동문선이 가진 판권의 화려함과는 정반대로 번역의 질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처음엔 짜증스럽던 것이 이제는 무서워지려고 한다. 과연 편집자가 있기는 있는 것인지.
오래전 동문선의 책을 샀을 때, 그 안에 덤으로 들어 있던 도서목록 같은 게 있었다. 책과 출판문화에 대한 여러 얘기가 있었는데, 그중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이 ‘백과사전을 찢자’는 글귀였다. 대강의 요지가 찬장에 백과사전 꽂아두지 말고, 유용하게 쓰자는 말이었는데 그 마지막 부분은 아직도 선명하다. “때 묻고 찢어지고 구겨지고 너덜너덜해진 백과사전 한 번 구경해 봤으면 좋겠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바라 건데 처음의 반만이라도 닮아라. 책값도 따라서 닮으면 좋고 : ) 
[까치], 방안의 책장을 쭈욱 둘러보면 여기저기 분야별로 몇 권씩 꽂혀있다. 가장 이쁜 장정을 한 책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1, 2, 3』2쇄 이다. 1권은 노란색, 2권은 밝은 갈색, 3권은 파란색. 1쇄 때의 그 밋밋한 하얀색 표지에 색을 입히니 책꽂이에서 유달리 빛난다. 누가 까치 책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까치도 이제는 시류(?)를 쫓아 『아르센 뤼팽』 전집 이후에는 표지가 알록달록해지고 있지만. [새물결]의 출판사 카피가 “長江의 앞 물결이 뒷물결을 밀어낸다”라면 모든 [까치]책에 그들만의 정체성을 당당히 밝히는 카피! “값/뒤표지에 쓰여 있음”
[이후]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게다. 헌책방보다는 큰 대형서점에 더 많이 꽂혀있는, 그보다는 학교 앞 작은 사회과학 서점 한 칸이 더 잘 어울리는 책들. 99년 여름이었나 보다 [공덕동/굴다리서점]에서 『신좌파의 상상력』을 샀다. 다 읽어낼 자신이 퍼뜩 들지 않았음에도 몇 장을 넘기다 책을 덮고 큰 숨을 들이쉰 것은 “컬리지언 총서를 펴내면서”라는 짧은 글을 읽으면서였다. 기형도의 ‘대학시절’로 시작되고 있었다. (내 군대 이등병 시절, 화장실벽 틈에 숨겨두고 틈틈이 보던 게 기형도의 수화였다.) “나무 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 그러다 난데없이 다른 시가 머리를 쳤다. (그 이등병 시절, 막 울음이 났던)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그러다가 [이후]의 글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당신은 청년입니까? 들어본 지 오래된 말이라구요. 저도 불러본 지 오랜만입니다. 저희는 당신을 앞으로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쑥스럽다구요? 아닙니다….” 나는 듣고 싶었다.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해도 듣고 싶었고, 그날로 책을 다 읽어냈다.
한 권의 책을 통틀은 것보다 단 몇 줄로 더 큰 공명이 일 때가 있다. 이후가 이후에도 나날이 번창하기를 !
to be continued
2000-02-02 05:38:43 posted by antim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