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크리스티안 면회를 다녀왔다, 마침 생일이라는데, 보호소에서 생일이라니, 축하는 듬뿍 해줬다. 크리스티안의 모습은 뭐랄까 보호소에 있으면서 얼굴이 그리 좋아진 사람은 처음이다. 술로 가슴츠레하던 눈은 광채가 나고, 가슬가슬하던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게 그간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다. 안 될 말이지만, 그 안에서 오래오래 투쟁해도 되겠더라. 크리스티안은 화성보호소로 갔다가 다시 목동출입국으로 오게 됐는데, 아주 특별한 경우다. 왜 그런지는 자신도 모른단다. 아마도 마붑이 국가인권위에 낸 진정서 때문인 듯싶다. 진정서가 먹혔다기보다는 인권위에서 조사차 몇 번이고 다녀가야 할 텐데 지들 편하자고 그랬을 거란 추측이다. 대화 중 황당무계한 소리를 들었는데, 거참, 출입국이 단속하는데 용역을 쓰는 거야 오래전부터 그랬다지만 학생들을 쓴다는 거다.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쓴다고 하더라. 하기야 지난 4월엔 군포에서 잡힌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단속에 협조하면 풀어준다고 해서 그의 동료 18명이 잡힌 사건이 있었다. 출입국이 뭔 짓이든 못할까.
수업받는 학생과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를 봤다. 용산 cgv에서 봤는데, 영화 시작도 예정보다 5분 정도 늦더니 한 1분 정도는 화면이 안 나오는 것이다. 결국, 왜 그들이 만나게 됐는지는 모른다. 영화는 부부싸움에 대한 얘기이다. 그렇게 싸우면 정들까? 별로 재밌게 보다가 끝에서 식상해버린 바람에 앞에 1분을 핑계로 환불받았다. 실은 매니저가 그 1분에 대한 사과를 당연히 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사람들은 휙휙 나가는데 별말을 안 하는 게다. 가서 얘기했더니, 너무나 친절하게 고객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주겠다기에, 그럼 환불받겠다고 했다. 계속 생각했던 수위를 넘어서 미안해하는데 어찌나 나도 미안하던지. 고객님의 환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환불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 심기 정도는 환불받으면 좋아지는 딱 그 정도다. 실제로 환불받으니까 좋아지던걸. 그나저나 브래드 피트는 어쩜 더 이뻐졌니.
월급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왔다, 어라 하고 좋은 게 아니라 이거 잘 못 된 거 아닐까라는 생각에 잠자코 있을까 그냥 확 다 써버리고 몰라라 할까 몇 초 심각하다가 전화를 해 봤다. 연차수당이 나왔단다. 얼쑤
금연한 지 어언 1개월하고 반이 지났다. 자전거를 못 타는 날은 달리기를 하고 있고 꽤 오래 멈추지 않고 달린다. 몸이 좋아진 게다. 하루 두 갑 이상의 담배를 펴댔는데, 한 달에 12만 원꼴이 나갔다. 자전거 할부금을 내고도 얼마가 남아서 여기랑 저기 후원금을 늘렸다. 저기서 갑자기 후원금을 올린 이유를 묻는데, 금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시 담배를 피우면 내리게 될 거라는 말은 차마. 여하튼 내년 2월까지는 안 피운다. 그리고 매닉! 선물 ~~! 🙂
[카테고리:] Monologue
라디카와의 인터뷰
지난 3월 6일 고려대에서 라디카 동지를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하염없이 게을러서(바쁘기도;;;) 이제야 녹취를 풀고 간단하게 정리를 해서 올립니다. 389일간의 농성이 있었으나, 농성 해단식이후 농성투쟁단이나 이주지부(현 이주노조) 여타의 연대단위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막 끝났을 즈음엔 연대단위로써 평가 같은 것을 쓰려고 준비를 하다가, 그보다는 이주 분들의 목소리로 농성에 대해서 듣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라디카 외에 몇 몇 이주동지들을 만나서 얘기를 들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냥 목소리만 잘 저장해 두고 있답니다. 😉 그 중 하나를 풀어 올립니다. 편의상 말이 짧습니다.
부깽 : 이주노동자는 남한사회에서 약자이다. 그 앞에 여성이 붙었을 때 이주여성이라고 했을 때, 일상이나 투쟁 중에 더 큰 불편이나 차별은 없었나.
라디카 : 농성 할 때 처음엔 같이 싸우러 왔는데 여성, 남성 느낌이 없었다. 농성하면서부터는 쪼끔 느낌이 있었다. 어디 갈 때나, 집에 갈 때나. 회의 할 때, 세 명이 있었는데 소하나, 링링. 우리한테는 안 물어보고 남성들과 한국 사람들만 회의를 했다. 처음엔 그랬다. 우리한테는 한 번도 안 물어보고, 그래서 맘이 많이 다쳤다. 우리도 싸우러 왔다. 그러다 한 달 가까이 소하나하고 우리끼리 얘기했다. 우리한테는 안 물어보고 우리는 당신들한테 말도 못하고 그런 얘기를 한 뒤 조금 바뀌었다.
부깽 : 투쟁 현장이라지만 여성과 남성의 독립된 공간이 없었다.
라디카 : 처음엔 우리가 들어갈 때 여성자리 나성자리 구분이 없고 같이 있었다. 그 땐 남자친구 있어서 3번 텐트에 같이 있었고, 링링도 남편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소하나는 링링과 함께 있기는 했지만 힘들었다. 불편했다. 그렇게 두 달 넘게 생활했다. 우리가 여러번 말했다. 우리는 여성이니까 우리 자리 따로 만들어야 돼. 그때 문제도 많이 생겼다. 잠 잘 때도. 그때는 머리 아프고 정신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중에는 4번 텐트는 여자텐트가 됐다.
부깽: 4번 텐트를 여성들이 이용하게 된 게 농성 반년이 훨씬 지나서다. 두 달 쯤 지나서 얘기했을 때 한국 활동가나 같이 농성하던 사람들의 배려는 없었나?
라디카 : 우리가 텐트별로 밤에는 회의를 했다. 그때 우리가 얘기했다. 제가 3번 텐트 네팔공동체에, 소하나 링링이 4번에서는 얘기를 하고. 그렇게 하다가 그 얘기가 상황실회의에서 얘기하고 그랬다.
부깽: 그 얘기 후에 바로 됐나?
라디카: 아니다. 그 안에서도 얘기가 많았다. ‘여기 투쟁하러 온 건데 여성 남성이 뭐가 중요하냐’ 그런 얘기가 많았다. 투쟁하는 것은 맞지만 여성들 우리 3명하고 한국 여성들도 같이 있잖아. 다 합쳐서 하면 괜찮을 텐데, 그때는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 그때는 너무 힘들었다. 내가 얘기 하다가하다가 3개월 더 지나서 4번 텐트 여성이 이용하게 됐다.
부깽: 농성 초반에 단식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라디카: 처음 단식을 시작할 때 우리는 민주노총도 다 알고 하는 줄 알았는데 상황실에서 민주노총에 알리지 않았다. 우리가 단식 시작하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민주노총에 가서 얘기하는데 그때 그분들(민주노총)이 ‘우리는 몰랐다 상황실이 우리에게 안 알려줬다. 그래서 몰랐다.’ 민주노총 사무실에 갔을 때, 그런 얘기를 들었다. 단식 시작 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왜 했냐? 단식하는 이유가 뭐냐?’ 단식하는 이유가 뭔지 선전을 하고 여러 단체에 알려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았다. 상황실에서 여러 단위에 알리지 않았고, 그거 알려줘야지 사람들이 관심가지고 연대했을 텐데.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조금 그랬다.
부깽: 단식 이후에 몸은 어떤가?
라디카: 단식 있을 때 여기 골반부분이 이상하게 아팠다. 단식 시작하기 이주일 전부터 아팠다. 단식해서 약 먹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약 안 먹고 30일까지 단식하고, 한 달 동안 단식하고, 단식 끝나고 일주일 있다가 너무 많이 아파서 약 먹었다. 단식 할 때는 너무 아파도 참았다. 동지들 석방 할라고 약도 안 먹고 그냥 했는데. 근데 딱 끝나고 너무 힘들고 아파서 예전에 그때 의사가 준 약을 먹었다. 그때는 너무 늦었다. 단식 끝나고 안양에 가서 병원에 다니고 집에 왔는데 많이 아팠다. 한 달 넘어서 병원에 갔다. 여기서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고 나도 몸도 마음도 너무 많이 아프고, 내가 혼자 스스로 했다. 병원에 다니는 거,
부깽: 단식 2주 때 몸이 아프다는 것을 농성장에 알리지 않았나.
라디카: 텐트에 얘기 했다. 그때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근데 그 때는 내가 약을 먹을 수 없었다.
부깽: 단식 중단하라는 말은 안했나?
라디카: 그 말을 했다. 자주했다. 근데 아무 이유 없이 단식 풀어라 그런 얘기 많이 했다. 하지만 우리가 목적이 있는데 아무 결과 없이 어떻게 단식을 그만 두냐며 상황실장과 많이 싸웠다.
부깽: 처음에 단식 시작했을 때 상황실에서 민주노총에 말을 안했다 알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걸 단식하는 동지들이 알게 된 게 얼마나 지나서였나?
라디카: 아마 15일 넘어서 인거 같다. 보름이 지나서 민주노총에 갔었는데 말을 안 해서 우리가 단식하고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하는 말이 “너희들 언제부터 하는지 몰랐다. 안 말해줘서 몰랐다.”
부깽: 단식 날짜가 며칠이었나? 기간?
라디카: 2월 17일부터 3월18일까지 30일 가까이 했다.
부깽: 단식을 푸는 과정에서 식사는 어땠나?
라디카: 따로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농성장에서 식당에 나가서 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돈 아까워서 어떻게 밖에 나가서 먹나, 나는 단식 풀고 안양 이주여성 센터에 한 달 정도 있으면서 치료 받았다. 시실라 언니가 많이 도와주고 그 뒤에 농성장으로 돌아왔다. 알아서 돈 달라고 해서 식당으로 가라고 했다.
부깽: 농성장에서 따로 챙기지는 않았나?
라디카: 말을 했는데, 해준다고 했는데, 하루 이틀 정도만 챙기고 이후엔 안했다. 우리도 무서웠다. 단식이 처음이고 어떻게 식단을 챙겨야 하는지 몰랐다. 돈이 아까워서 농성장에 돈이 없어서 하루에 두 번 세 번 (챙겨) 먹어야 하는데, 돈 문제로 바깥에 나가서 먹을 수 없었다. 다른 동지들한테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부깽: 실은 이때 농성장에서 단식하셨던 분들이 편의점에서 혼자 죽 사먹는 걸 계속 봤다.
라디카: 농성장에 돈이 없었다. 우리가 미안해서 돈 달라는 소리도 못했다. 그래서 혼자 해결했다. 거기서 알아서 했어야 하는데, 우리도 말을 하다가 말았다.
부깽: 치료는 어떻게 했나?
라디카: 농성장에 있을 때는 의사들이 자주 와서 병원도 데려가고 그랬다, 그리고 몸에 병 있다고 약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단식하고 있어서 약 먹을 수 없다고 했다. 단식 끝나고 이후에 두 달 있다가 더 아팠다. 계속 참았다. 단식 풀고 일주일 있다가 약 먹었다. 먹을 때는 안 아프고, 그 담에는 조그만 염증이 생겼는데 그 뒤에 커져서 많이 아팠다.
부깽: 단식에 대해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라디카: 단식 끝나가지고 농성장에서, 솔직히 얘기하면은, 우리 단식했던 사람들 생각은 우리 병원에 데려가서 건강검진을 받게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도 안했다. 상황실에서 준비한 게 아니라 연대단위에서 와서 텐트 안에서 (건강검진을) 한 게 다였다. 상황실에서는 여기서 하니깐 신경 쓴 것 같지는 않다. 거기서(상황실)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
나하고 단식했던 사람들 화가 많이 나고 너무 마음이 많이 상했다. 그때부터는 농성에 대한 희망이 많이 줄었다. 농성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일을 하다가 쓰러졌다. 병원에 갔더니 단식 때 염증이 커져서 이렇게 된 거다. 지금까지 약을 먹고 있다. 일은 계속 못 하고 있다. 약은 3개월 정도 더 먹으면 된다. (라디카는 지금도 여전히 일주일에 3번씩 병원에 가고 있다.)
부깽: 농성장 내에서 갈등이 있었나? 사안에 대한 결정들이나 그 결정과정에 대해 이주동지들의 참여 문제를 들어보고 싶다. 다시 농성을 한다면 꼭 이건 준비하고서 하자고 생각한 거나, 이건 미흡했다고 생각한 게 있나?
라디카: 그때 우리는 농성을 어떻게 할지 몰랐다. 그냥 ‘우리 권리 때문에 싸워야 돼’라고만 생각했고, ‘한 달 정도만 싸우겠지’라고 생각했다. ‘한 달 까지는 싸울 거야’ 그러면 우리 문제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농성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싶다. 여성동지들이 너무 힘들었다. 여성 남성 따로 독립된 공간이 있을 거라고 들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소하나에게 농성에 함께 참여하자고 말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링링도 참여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렇지 않았다. 농성을 다시 한다면 여성 공간을 따로 만들고 시작해야한다. 그걸로 많이 싸웠다. 소하나는 특히 많이 싸웠다. 혼자 힘들게 싸웠다. 나와 링링씨는 애인이 있었는데 소하나는 혼자였다. 소하나는 너무 힘들었다. 다시 농성을 하면은 이주노동자 말이 우선 됐으면 좋겠다. 지난 농성처럼 한국 활동가가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주노동자가 돼야 한다.
부깽: 해단식 이후에 농성장을 떠나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 때 어려운 점이 있었나?
라디카: 나도 다른 동지들처럼 방세 줄 돈도 없고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도 못하고 너무 어려운 상태였다. 어려운데 도와달라는 말도 못하고 그래서 액세서리 만들어서 학생들이나 친구들한테 팔아달라고 해서 살았다. 나는 그렇게 했지만 나보다도 같이 농성했던 다른 동지들이 방도 없이 갈데없이 더 힘들었다.
부깽: 이런 생계 문제로 민주노총이나 상황실에 건의 하지는 않았나.
라디카: 얘기가 나왔지만 나는 너무 열받아서 회의에 가지 않았다. 방도 없고 갈 데도 없는데 어떻게 해주세요. 이런저런 요구를 했는데 안 해줬다.
부깽: 제작년부터 작년까지 1년 넘게 농성투쟁을 했다. 다시 이렇게 하라면 할 수 있겠나?
라디카: 나는 아직도 할 수 있다. 농성할 때 부족한 것들 이주노동자들이 몰랐던 것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많이 배웠다. 이 배운 것들로 새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부깽: 농성투쟁 이전에도 투쟁 경험이 있나?
라디카: 아니 처음이다. 농성 시작할 쯤 집에 가려고 했었다. 단속이 너무 심해서 가야지라고 생각했는데, 회의가 있었는데, 샤말타파를 만났다. 샤말타파의 말을 듣고, 회의에서 나온 얘기를 듣고 투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깽: 별 얘기 안했는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다음엔 진짜 맛있는 커피를 사겠다.
라디카 : 기대하겠다.
——————
고려대 근방에 아는 데라곤 보헤미안 하나였는데, 문이 닫힌 바람에 조용히 얘기 나눌 수 있는 곳을 찾아 30여분을 헤매다 결국 다시 고대과학도서관(?)으로 돌아가서 자판기 커피를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눴다. 이후에도 라디카 동지를 여러 번 만났지만 아직까지 맛난 커피를 대접하진 못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녹취를 풀면서 당시 상황이 떠올랐다. 라디카는 단식 얘기를 하면서 내내 울었다. 4명의 동지들이 단식투쟁을 했었는데, 라디카 외에 마숨과 단식에 대한 얘기를 했다. 까지만동지는 단식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대신했다.
한참 지난 뒷얘기 – 라니카는 그간 잠시 일을 했지만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지금은 피자매연대에 달거리대를 만들어 파는 것과, 비즈공예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주일에 세 번 병원에 가는데, 지금 가진 돈으로는 어림없는 상황이다. 가장 치열한 투쟁은 아주 개인적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있다. 거기서 우리는 구체적인 것들, 당장 해결해야 하는 것들과 싸우게 된다. 우리의 구호와 연대는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또한 우리들의 사적 영역을 바꾸자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들, 사적 영역이 모인 것들, 그게 바로 세상이다.
작은대안무역 – 홍대 아우라
작은 대안무역 – 홍대 아우라
안녕하세요, 오늘! 토요일 홍대 아우라에서 작은 대안무역이 열립니다. 어제 자히드 가족과 마을공동체에서 옷을 보냈는데, 이번엔 큰 사이즈의 옷도 많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온 옷들 중 최고라는 소문이 파다해요. 오늘 아우라에서 새로운 예쁜 옷들과 액세서리- 카드, 팔찌, 목걸이, 귀걸이, 배지 등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진엔 없지만 나시와 반팔도 있어요 ~
*옷감에 자수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
*자수를 놓는 방글라데시 노동자
*악기를 만들고 있는 노동자들
*자히드
그리고 지난 반전집회 때부터 네팔 라디카 동지의 비즈공예품을 함께 판매하고 있어요. 라디카 동지는 작년 농성 중에 30일간의 단식으로 지금까지도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지속적으로 못하고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거나, 집에서 비즈공예품을 만들어 그 수익금으로 병원비와 생계유지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라디카,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해 주세요.
*7월 3일 여성행진 때 라디카 동지
홍대 아우라 – 산울림 소극장 맞은편
Party Benefit & Jam (four!)
cover charge / 입장료 10,000 won
2005.7.9 / Saturday July 9, 2005 8 PM – 11:30 PM
{performing live}
PAUNA (modern rock)
Elephant 808 (electronica driven folk)
ANOKHA (high energy rock beat fusion)
Stop Crackdown (rock)_이주노동자밴드
일요일 평택평화행진 때 비가 오면 작은 대안무역은 열리지 않습니다.
달리다
달린다. 희미하게 가로등만이 멀찍이 섰고 물안개가 자욱하게 길을 덮었다. 숨을 들이 쉴 때마다 온통 습한 비린내가 폐를 진동한다. 숨이 급하게 가빠오고 팔이 올라가질 않는다. 간혹 지나는 이들의 눈빛이 성가셔도 멈추지 않는다. 조금만조금만 하면서 예까지 왔다. 다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정수리부터 송글거리던 땀이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다. 그것이 이마를 따라 눈에 고였을 때 눈물이 났다. 그렇게 아픈 날들은 아무리 쥐어짜도 안 나오던 것이 고작 땀 한 방울을 못 이기는 게 괜히 억울했다. 이참에 막 울어볼까 싶어서 멈춰 선다. 어두웠고, 여기는 지나는 이들도 없고, 한참 멀리 낚시꾼들만 졸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가만히 섰는데 소리가 들린다. 풀벌레 울음으로 강물이 흔들리고 먼데서 빛들도 따라 흔들린다.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나는 다시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집을 한디위 지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달리는 동안 아무생각도 하지 않았다. 온 몸의 맥이 두근거리며 요동칠 때 모든 게 아팠다. 어느 한 구석 남김없이 아팠다. 한참 온 몸을 들썩였다.
끔찍하게 정상적인 무료시사회
제목 : 끔찍하게 정상적인 (셀레스타 데이비스Celesta Davis 감독, 미국, 76분)
일시 : 2005년7월8일(금)
장소 : 광화문 미디액트(5호선 광화문역 5번출구 혹은 1,2호선 시청역 4번출구 프레스센터 방향 5분거리)
주최 : 10회 여성영화관객상기획단
주관 : (사)여성문화예술기획
더 자세한 내용은 여성주의영화 무료 시사회를 참고하세요. 아, 놀이방 운영은 안한다고 합니다.
지난 여성영화제에서 표를 구할 수 없어서 못 봤던 영화입니다. 이번엔 일찍부터 줄서서 꼭 볼 계획입니다. 오는 금요일 7시 30분 상영이고, 15분 전부터 표를 나눠준다고 하네요.
감독과 작품에 대한 소개가 궁금하시면 지난 여성영화제 홈페이지를! 보다 더 궁금하시면 여기를!
남성 페미니스트
지난 한 주 mi-ring은 충분히 떠들썩하다. 이런 들썩임은 가벼운 얘기부터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얼핏 모순처럼 들리는 진중한 고민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가벼운’이라는 수사는 경망스럽거나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분주하고 좀 더 일상적인 것을 말한다. 챔피언을 쓰러뜨리는 것이 한방의 펀치가 아니라 무수한 잽이듯이 견고한 중심을 흔드는 것은 자잘한 주변의 분주함일 것이다. 대단치 않아 보이는 우리의 ‘가벼운’ 일상 말이다.(그를 핑계 삼아 나는 당신들에게 잔뜩 귀 기울이고 있다.) 나는 mi-ring에 ‘쉽게’ 덜컥 가입한 쪽인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가입규약이 내 ‘입장’과 그닥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장이란 단순히 하나의 시각을 갖는 정지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을 중심으로 탈바꿈시키는(사유하는) 동적인 상태를 말한다. 당신의 젠더가 무엇이든 간에 그 고민이 삶 속에 지속적으로 녹아내린다면 어떤 가능성이든지 개연성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고, 하나의 시선을 넘어서 세계관이자 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페미니즘’들’은 그런 것이다.
“나는 부깽이다. (부깽은 남성이다.) 부깽은 페미니스트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의 요건으로서 생물학적 성이 한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사회적 존재로서의 젠더가 요구된다고 본다. 이것은 ‘부깽은 남성이다’에 괄호를 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괄호 안의 ‘남성’은 남성/여성이라는 권력 체계를 지탱하기 위한 극단적 이분법으로만 읽혔을 뿐이다. 괄호 치기는 고정된 성별 정체성 바깥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읽어내고 권력화된 이분법과 투쟁하는 것이다. 이 권력에 대한 투쟁은 권력의 구조를 드러내게 될 것이고 ‘차이’는 더는 ‘~과 다름으로써’ 열등한 것, 부정적이고 분할적인 것이 아니라, ‘~과 다름으로써’ 지금과 다른 대안적 가치들을 생산할 수 있는 한 조건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괄호를 연다.
“나는 부깽이다. (부깽은 남성이다.) 부깽은 페미니스트이다. 부깽은 ‘남성’이다.”
이 ‘남성’은 새로운 성별로써 ‘다른 남성’ 또는 ‘다른 여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운명을 벗어난 ‘탈성별화된 인간’으로서 주체이다. 자기 결정권이 박탈된 세계에서 여성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변화된 사람들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다. ‘여성주의 행동’을 통해 새롭게 표상된 세계 안에서 ‘차이’를 긍정하고 모든 상징적 소수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자격과 목소리를 돌려주는 것이다. 모든 주변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고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발화의 사회적 지점을 떠나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 페미니즘’들’이 있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불협화음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하딩의 말처럼 필요한 것은 통일이 아니라, 연대이다.
여성주의 웹링 mi-ring
저도 잘 안 오는 블로그지만 refeed를 통해서는 많은 분의 글을 읽고 있답니다. 그러다 mi-ring에 관한 글이 제 rss를 기준으로 폭주하더군요. : ) 이게 뭘까 해서 들어가 봤습니다. 그리고 링크를 따라 글을 읽으면서 여성주의자이며 소수자운동에 지지를 표한다면 가입하라 길래, 가입했습니다. 네, 다시 읽어봐도 글을 안 쓰는 사람에 대한 혹은 어쩌다 쓰는 사람에 대한 제제가 없어서 우선 안도부터 합니다.
mi-ring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re-presentation과 Blooming Town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mi-ring”은 minority, my의 뜻을 담은 “mi”와 web-ring의 “ring”을 결합시킨 것으로 여성주의와 소수자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의 웹링입니다. mi-ring으로 엮인 많은 분의 블로그가 지극히 사적인 부분을 담고 있어서 더 설렙니다. 그분들의 사생활이 궁금하다기 보다는 여성운동과 소수자 운동이 담론으로만 떠도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어떻게 배어 나오는지 그것들이 이렇게 고리를 타고 흐르면서 어떤 힘을 발휘할지가 기대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들의 생활이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하기를 내 활동이 그들을 자극하기를 모두가 온라인 밖에서는 들썩이기를 바랍니다. 네, mi-ring이 생각처럼 살 수 있는 동력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꿈쩍도 안 하는 것들에 지쳤을 때 혼자 위안이라도 받아보자는 것이죠.
이 링이 점점 커져서 지구만 해졌으면 좋겠네요. mi(racle)-ring이 되면 멋지겠어요. 끈질기게 야금야금 세상을 바꾸는 기적 같은 고리가 되기를요. :)
스스럽다
봄이 언제 다녀갔나 싶었을 무렵일까 참세상에서 ‘이꽃맘’이라는 이름의 기자를 봤다. 워낙 열정적으로 글을 쓰는 분이라 자주 이름을 보게 되는데,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이꽃망울’이라는 이름의 처자인데 3대 만에 집안에 여자가 태어나 할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란다. 고운 이름이고 이름만큼 사람도 고왔지 라고 기억해 본다. 이름이 생각 속에서 떠오르거나 혹은 기억들이 아무렇지 않게 아는 척하는 것과는 다르게 요전에 그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는 아무렇지 않지 않더라. ‘아무렇지 않다’는 뭔가 풀어야 하는 실타래를 가진 관계처럼 보이니 그보다는 ‘스스러웠다’ 정도가 맞겠다. 그날 ‘어 누구지’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 인사를 건 내는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난 후 그 앞에 서서 아는 척하기가 껄끄러웠고, 그로 좀 전까지 익숙하던 공간이 갑자기 불편해 지는 것이다. 이런, 되짚어보면 불편해할 사이라기보다는 우연한 만남을 두고 서로 호들갑 떨며 반가워했을 법도 한데 말이다. 낯모르는 얼굴들이 관계를 맺어가며 스스러운 마음을 떨어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만큼 다시 스스러워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여하튼 그 자연스러움을 탓하자는 것은 아니고 늦었지만 안부를 묻는 것이다. 타이밍은 아무 데서나 중요하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 말이다.
꽤 오래전인 데 5,6년 전일까, 그를 부르는 호칭은 ‘꽃’을 빼고 망울이라고 불렀다. 그 무렵 나는 동생 손전화에 더부살이하고 있었다. 동생이 군대 가 있는 사이에 잠시 그의 손전화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이 휴가를 나왔을 때는 손전화를 돌려주곤 했다. 그 즈음이었을 게다. 망울이에게서 온 전화를 동생이 받았다.
동생이 “네.. 여보세요?”하는데 “망울이~”라는 말만 들렸단다. 동생이 칼진 억양으로 “네?”라고 반문했더니 다시 들려온 소리는 역시 “망울이~~”였다. 슬슬 짜증이 난 동생은 신경질적으로 “네 뭐요?”라고 물었단다. 그래도 들리는 소리는 “망~~우~~~~리~~~~~~~”였단다. 동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여기는 신길동”하고는 전화를 뚝 끊었단다. 그날 동생은 망우리에서 전화 왔다고 전하더라. 그 밤 많이 웃었는데.
생뚱맞게 ‘이꽃맘 기자’ 이름에서부터 많이 왔다. 그에게도 내게도 시간이 흘렀고 다른 세월을 쌓았을 게다. 거기 어디쯤에서 이제는 스스러워진 ‘이꽃망울’을 기억해본다.
세 가지 일
방을 깨끗이 치웠다. 이번엔 모든 재떨이 대용품들도 없애버렸다.
머리를 빡빡 깎았다. 빡빡머리가 잘 안 어울리는 건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더위를 이유로 깎아봤다. ‘빡빡머리……’ 중얼거리는데 누구는 출소한 사람 같다는 말을 누구는 레옹 머리 같다는 말을 한다. 레옹? 호호 듣고 보니 괜찮네.
신대철 산문집도 있더라. 『나무 위의 동네』라고 89년에 청아에서 나왔다.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보게 됐는데, 쨍하고 해 뜨면 읽어야지. 라고 생각하며 샀다.
며칠 동안 가장 큰 변화는 담배를 안 피우는 것이다.
방에서 담배 냄새 나는 게 지긋지긋하기도 했고, 갚아야 할 할부금을 마땅히 쪼갤 곳도 없고 해서. 한 달에 담뱃값만 10만 원이 나갔으니, 이제부턴 숨통이 좀 트이지 않겠어. 라고 생각하고 있다.
커피는 볶은 지 하루가 조금 지난 과테말라 커피가 최고다. 이름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고대 앞의 거기가 정말 맛있다.
작은 대안무역
작은 대안무역은 강제추방 이주노동자와 지속적으로 연대를 모색하던 중 시작하게 됐다. 그간의 사정이 여러 것이 겹치나 활동을 지속하면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내가 읊조리던 동력은 생활에서 발견해 내면 그뿐이다.
기존에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모임은 후원사업의 하나로 배지를 팔거나 모금이 주 활동이었다. 주로 집회에서 한정된 공간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지만 그래도 알차게 진행됐다. 그런데 이 모금을 지속한다는 것은 여러 이유로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안무역 얘기는 이전부터 나왔지만 그 사업의 진행 중에 생기는 책임을 떠맡을 주체가 명확하지 않았고, 모임의 역량 밖이라고 생각하고는 번번이 미뤄지곤 했다. 그러던 것이 죽이되 든 밥이되 든 해보자는 심정으로 노동절부터 시작하게 됐다.
4 30. 여의도 노동절 전야제
5 01. 광화문 노동절 집회
5 08. 종로 부처님오신날 행사
5 14. 대학로 평화를 위한 난장
5 17. 서강대 문과 학생회 이주노동자 사업과 연대
6 02. 숭실대 열사추모제 이주노동자 사업과 연대
무모했는지 모르지만 시작 이후 역량만큼 꾸준히 만들어 가는 셈이다.
온라인에서도 맞물려 작업을 진행했는데 얼마 전에 ‘작은 대안무역’ 사이트가 완성됐다. 도착한 작품들을 올리는 일이 남긴 했는데, 무거운 짐을 한껏 덜고 갈 수 있으니 진척이 빨라 질 것이다.
아래는 작은 대안 무역을 소개하는 날림 글이다.
2003년 겨울부터 2004년 끝 무렵까지 389일간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이 있었습니다. 1년이 넘는 투쟁을 해왔던 이주노동자들이 농성을 접었을 때 그들이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쳐버린 몸을 뉘일 방 한 칸도 없었고, 당장 생활을 이어나갈 돈도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정부로부터 어떤 호의적인 조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빈털터리인 채 한국 사회 속으로 다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외려 한국정부는 고용허가제 시행 성과를 내기 위해 강력단속기간을 정하고 무자비한 단속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단속과정 중 어디에도 인권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일하는 공장에 들이치는 것은 기본이고 보행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여권을 검사하는 게 아니라 우선 잡아간 후 안에서 검사하는 가하면 심지어는 가정집에 창문을 깨고 들어가 단속을 벌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단속 속에서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고국으로 쫓겨 가게 됐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지옥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귀향은 우리의 생각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오만하게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들의 삶도 없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추방 이주노동자들의 삶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불의에 맞서 투쟁했던 대가를 고향에서 치르는 중입니다. 여기, 아니면 저기 어디에선가 삶이 계속되듯이 고통, 불안, 회한, 가난, 질병도 계속 됩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투쟁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추방 이주노동자들과 끝까지 연대할 방법을 모색했고, 그 일환으로 “작은 대안무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조그만 힘이라도 보탤 생각입니다.
‘작은 대안무역’은 크게 세 가지 의의를 갖습니다.
먼저, 네팔과 방글라데시에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내수공업의 형태로 옷을 만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의를 설명하고 주문을 넣게 되면 한 마을의 여성들이 집에 모여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동체로서 여성들의 연대를 고취시킵니다.
둘째, 네팔과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이나 가족들과 한국에 와 있는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연대를 촉진하게 됩니다. 서로 떨어져 있게 된 가족들 사이를 연결하고,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서 살게 된 사람들의 대화를 속개하게 될 것입니다. 네팔과 방글라데시의 여성문제에 대해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연대하며 투쟁하고, 한국의 이주노동자 투쟁에 네팔과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이 연대하여 투쟁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네팔과 방글라데시의 여성들과 추방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한국 내의 이주노동자들과 한국 사람들 간에 삶의 공통적인 문제들을 공유하면서 연대를 튼튼하게 짜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작은 대안무역’을 통해 네팔과 방글라데시 여성들의 삶을 알리고, 한국에서의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알리고, 또한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알리는 소식을 함께 실어 나를 생각입니다. 이 ‘작은 대안무역’에는 계약서만 서로 주고받고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투쟁소식과 삶의 다양한 억압들에 대한 대안들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작은 대안무역’에서 다루는 작품들의 최종소비자는 작품들과 함께 이 모든 소식들도 접하게 될 것입니다.